그리운, 아직도 그리운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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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바다

[유성문의로드포엠]그리운, 아직도 그리운 금강산

내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가로막는 철조망 때문이 아니다
밀려왔다가도 다가서면 멀찌감치 물러서는
바다 때문이다
내가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드리워진 철조망 때문이 아니다
그리움으로 밀려들어 슬픔으로 빠져나가는
바다 때문이다
바다 때문이다
걸을수록 지나온 자취조차 쓸려버리고
나는 한점 목마름으로 출렁거린다

- 반암해수욕장 -

촌스럽게도 나는 비행기 타고 가본 해외는 제주도가 유일하고, 국적이 다른 외국(?)이라고는 ‘평양공화국’뿐이다. ‘평범직딩’ 조은정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히말라야나, 킬리만자로나, 미시시피 따위에는 어떤 감흥도, 기대도 갖지 않는다. 솔직히 여력이 없음이 첫째 원인이겠지만 그 길들에는 그리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애써 강변한다.

나는 오로지 그리움 때문에 길을 간다. 속초에서 7번 해안도로를 따라 고성의 동해바다 근처를 가끔 얼씬거리는 것도, 그 길의 끝에 해묵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주제’라고 할 것도 없이 금강산은 언제나 그리움 그 자체였다. 배를 타고 들어가다 못해 이제는 뭍으로도 길이 열렸지만, 아직도 금강산은 ‘그리운 금강산’이다. 아니 그리움은 더 절실해졌다. 그리움은 볼 수 없어서, 갈 수 없어서가 아닌 까닭이다.

*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화가 손장섭이 그린 ‘동해바다’를 일러 우리 시대 동해바다를 가장 극명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화면을 철조망으로 가로막고 동해바다의 흰 포말을 강조하여 이미지의 상충이라는 회화적 효과를 얻어냈다’는 그의 그림은 풍경을 지극히 의식적으로 읽어낸다. 나는 그의 그림을 흉내내되, ‘의식적’으로 철조망을 바다 아래 배치했다. 다행히 빛에 쫓겨가는 갈매기 한 마리가 화면에 걸려들어, 풍경은 단지 빛과 시간의 소산임을 새삼 일러주었다.

나는 금강산 가는 길의 기점을 속초의 ‘아바이마을’로 잡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청초호의 아바이마을은 실향민의 마을이었다. 실향민처럼 그리움으로 절실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거기서 길을 나서기가 무섭게 만나는 청간정은 남쪽에서 보면 관동팔경의 최북단이자 고성의 관문이다. 칠곡처럼 고성에는 ‘고성’이 없다. 원래 고성읍은 현재 북녘땅이고 남쪽의 읍 소재지는 간성이다.

금강산(실제로는 건봉산) 건봉사는 금강산권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한때 우리나라 4대 사찰 중에 하나였고 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등 강원도 일대 대부분의 사찰들을 말사로 거느린 거찰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의 뜻을 받든 사명대사가 승병 6000명을 훈련시켜 위난의 강토를 지켜낸 본산이며, 만해 한용운이 봉명학교를 지어 민족교육을 도모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주문 격인 ‘불이문’에 새겨진 금강저는 마치 절의 내력을 말해주는 듯하다. 금강저는 천둥과 번개의 신인 인드라가 사용했던 무기였다. 하지만 인간의 악업은 금강저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6·25 전쟁의 참화 속에 절은 사그리 불타버리고 불타지 않는 석물들만이 잔재되어 남았다.

눈쌓인 들판을 걸어갈제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뒤따르는 사람에게는 길이 되나니
- 서산대사 ‘청허담집’

화진포는 또 어떠한가. 북이기도 했다가 남이기도 했던 인간의 누추한 역사는 김일성 별장이니, 이승만 별장이니 하는 헛된 거푸집만 남겨 놓았다. 전쟁의 정치적 당사자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이기붕 별장까지 ‘꼽사리’끼어 들어서 있다. 이제는 고니조차 찾아들지 않는 화진포에서 그리운 금강의 잔영이 아련한 통일전망대에 이르기까지 나의 걸음은 사뭇 조심스럽다. 번거로운 신고절차와 총 든 군인들의 위세 탓이기도 하지만, 그 길이 내게 주는 가르침은 더욱 엄혹하기 때문이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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