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는 불타고 있는가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유성문의로드포엠]안의는 불타고 있는가

서방님 전(前)

서방님, 행복했던 시절은 흩어지고 이승은 이리도 불에 타고 있습니다. 치욕마저 마다하지 않은 당신 사랑으로 나는 늘상 당당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앞에서 버티어주고 계시니 뒤란에서의 나의 삶은 윤기에 넘쳐 났지요. 윤가면 어떻고 허가면 또 어떻습니까. 기둥은 튼실하고 마루는 매끄러우니 시렁 위에 얹힌 애틋함이야 누가 짐작키나 하겠습니까. 짐짓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바라보는 당신의 허튼 기침은 부뚜막에 앉은 나에게 미소로 내려앉곤 했지요. 서방님, 하지만 이승은 저리도 불에 타고 저승마저도 그리움으로 목이 마르니 옛집 또한 그렇게 추억으로 힘없이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안의 허삼둘가옥

소리나 빛은 모두 외물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이목에 누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 될 것인가. - 박지원 ‘물’

On road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IC-거연정/군자정/동호정/농월정|화림동계곡의 정자들-안의|박시원사적비/허삼둘가옥-건계정/거열산성-거창|거창박물관-거창사건추모공원


연암 박지원은 ‘강물 소리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귀와 눈만을 믿는 자’에 대한 경계의 말도 아끼지 않았는데, ‘치명적인 병’을 무릅쓰고라도 길을 가야 했던 나는 그나마 물소리가 가장 요란할 때 물 많은 고장을 가지 않는 금기 정도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함양 안의도 그렇게 물이 많아서 항상 괴괴한 심사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더구나 안의는 연암이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숱한 저술을 남겼던 곳이기도 했다.

수기(水氣) 때문이었을까. 안의의 옛 지명은 안음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영조 때 이웃 산음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조정에서는 음기가 강한 탓이라 여겨 산음을 산청으로 개명하면서 안음도 안의로 바꿔버렸다. 이렇듯 물 많은 안의에 최근 잇따라 화기(火氣)가 덮쳐들었다. 2003년 가을 화림동계곡의 농월정이 불탄 데 이어 2004년에는 허삼둘가옥에 불이 났고, 안의에서 함양 가는 길목의 정여창고택까지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모두 방화로 추정되는 불들이었다.

[유성문의로드포엠]안의는 불타고 있는가

특히 박지원사적비가 세워진 안의초등학교에 이웃한 허삼둘가옥의 소실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허삼둘가옥이 어떤 집인가. 1918년 윤대흥이란 사람이 진양 갑부인 허씨문중에 장가들면서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으로, 특이하게도 안주인의 이름을 따른 보기 드문 페미니즘적 문화유산이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집의 구조와 생활의 슬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부엌의 가구(架構)가 눈길을 끄는 사랑스런 집이기도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집안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들먹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집 부엌문에 설치된 시렁과 선반을 보고 안주인의 마음씀씀이를 짐작하면서 애써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곤 했다.

공연히 마음이 헛헛해진 나는 눈 쌓인 수승대를 돌아 덕유산 남쪽자락의 방기실마을 점터찻집에서 오미자차 한잔에 몸을 덥히려던 뜻을 접고 오히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현장인 신원면 과정리로 달려갔다. 1951년 겨울, 박산골짜기는 그야말로 ‘킬링필드’였다. 359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719명의 양민이 아군의 총질로 스러져갔고 시신마저 불에 태워졌다. 최근 그 죽음의 골짜기 맞은편에 거창한 추모공원이 들어섰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조지훈 ‘다부원에서’)’ 불고 있었다. 도대체 길을 가면서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란 말인가.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유성문의로드포엠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