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여, 눈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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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road

[유성문의로드포엠]무주여, 눈뿐이로구나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IC - 무주 - 금강식당|어죽 - 적상산|사고(史庫)터 - 무주리조트|스키장 - 곤돌라 - 덕유산 향적봉|설국 - 무주구천동|백련사 - 무풍마을|무풍장 - 나제통문


길을 가되 즐기지 못하는 나는 무주리조트에서 잠시 어색하다. 오스트리아풍 리조트에 은빛 슬로프에 원색의 스키복들은 행려빈자(行旅貧者)의 기를 죽인다. 실크로드니 레이더스니 서역기행이니 프리웨이니 이름조차 설레는 슬로프에 까마득한 젊음들이 마구 깔깔거리고 내달리고 엎어지고 뒹구는데 하릴없는 나는 자꾸만 오금에 힘을 주고 서 있을 뿐이었다. 요령을 피운답시고 향적봉까지 바투 올라가는 곤돌라에 편승하려던 얄팍함마저 길게 늘어선 행렬에 기가 죽어 꼬리를 내렸다.

할 수 없다. 나는 삼공리로 돌아들어 무주구천동 입구에서 아이젠의 끈을 조였다. 그 많던 구천동의 물들은, 물소리들은 이제 눈에 묻혀 고요하다. 더벅머리 시절 가슴을 에이던 물소리들조차 모두 잦아진 지금 나는 또 무슨 이유로 눈길을 가는가.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기침을 하자…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 김수영 <눈>

그래도 그때는 다리힘이라도 살아 있었다. 인월담에서부터 구천폭포를 지나 단숨에 향적봉까지 이르면 이마엔 땀이 맺히고 발밑으론 산야가 아득했다. 쉴 틈도 없이 바위에 걸터앉아 알코올 버너에 불을 붙여 라면을 끓이면 뒤늦게 도착한 등반객들은 따끈한 라면보다 젊음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제 향적봉은 고사하고 백련사에서 다리 힘을 풀어버린 나는 가슴 가득 고인 가래마저 억지로 삼켜버렸다.

눈 쌓인 계곡처럼 눈 쌓인 산사도 고요하다. 한때 9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살아서 그 공양미를 씻는 쌀뜨물이 계곡을 하얗게 물들였다는 백련사는 그 전설 때문에 지금 더 나그네를 황망하게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그렇게 눈으로 놓여 있는 산사 역시 그런대로 괜찮다. 문득, 법당 문이 열리고 스님 한 분이 먼 길을 나선다. 스님은 허허로이 내가 애써 걸어온 길을 되짚어 가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메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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