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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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문의로드포엠]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낙산 일출

잿더미 위의 일출은 얼마나 황홀한가
죽지 않는 자와 죽을 수 없는 자의 산을 넘어
빛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돌아온다 빛은
차갑게 식어버린 시간마저 무너뜨리며
녹슨 철조망마저 무찌르며
어둠을 타고 슬픔을 타고
오늘 그렇게 내일의 해가 떴다

- 낙산사 의상대 -

시인 고은이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제 ‘동해 낙산사!’는 감탄부가 아니라 탄식부로 ‘동해 낙산사!’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지었다는 이 천년 고찰은 고려 초 산불로 타고, 몽골의 침략으로 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타고, 6·25로 타고, 타고 타고 또 타고 마침내 올해 들어 식목일을 기념하여 탔다. 새까맣게 그을린 관음의 나무들, 종소리조차 녹아버려 이제 관음은 차마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띈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박두진 <해>

[유성문의로드포엠]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직 가시지 않은 연무로 희붐한 바다를 뚫고 해가 솟아오르자 관음의 장작더미들이 일제히 바다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앙상한 숯가지들은 손을 흔들어 ‘동해 낙산사!’라고 작약했다. 그랬다. 사람의 것들은 모두 타버렸지만 관음의 것들은 제 스스로 회복하고 있었다. 새카만 둥치 밑으로 소생의 싹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버려야 했던 것들을 밀치고 빛쪽으로, 빛쪽으로 말갛고 고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더 감동스러운 일화도 있다. 강릉에서 40년 넘게 수공예로 악기를 제작하고 있는 임창호씨는 타다 남은 낙산사 대웅전의 대들보로 두 달간의 고된 작업 끝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만들어 절에 바쳤다. 관음의 도량이 그만하니 속세의 인심조차 감화의 길을 간다. 이제 됐다. 관음은 다시 보고 듣게 되었다.

속초의 바다는 죽은 배우 손창호의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행려병자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배우는 죽기 전 그토록 속초 바다를 간절히 그리워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 간절한 바다를 밀려왔다 스러지는 파도처럼 숱한 청춘들이 들고 난다. 생각해보면 소생하는 관음이거나 스러져간 배우거나 모두 순환의 섭리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빛을 기다린다. 세상이 어둡고 고단할수록.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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