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경영권은 ‘피’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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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박난 두산家 ‘공동소유·경영’ 전통… 이미지 실추는 물론 사법처리 가능성도

[조명]그룹경영권은 ‘피’보다 진하다

지난 7월 1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두산그룹 본사 사옥인 두산타워 33층에 위치한 회장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두산가(家)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 두산가 맏형인 박용곤(장남) 명예회장이 갑작스레 소집한 회의였다. 회의내용은 “두산그룹의 경영권(회장)을 박용오 회장(2남)에서 박용성 회장으로 교체한다”는 것.

박용곤 명예회장은 “앞으로 박용성 회장에게 그룹경영을 맡기도록 하겠다”고 전격 발표했고, 박용성 회장은 “가족의 뜻에 따르겠다”며 회장직을 수락했다.

이날 ‘일요일 회의’에는 박 명예회장은 물론 용성(3남) 회장, 용만(5남) 부회장 등 두산그룹의 3세 경영인, 정원(박용곤 회장의 장남) 부회장 등 4세까지 합쳐 20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박용성 회장은 이날 제주에서의 사전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경해 참석할 정도로 가족회의는 ‘급박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이날 가족회의에는 지금까지 그룹을 총괄해온 박용오(차남) 전 회장은 물론 자녀들인 경원(장남)·중원(차남)씨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이날 가족회의는 두산가 형제간 경영권 분쟁의 서막을 알리는 첫 ‘사건’이었던 셈이다. 얼마 후 박 전 회장은 측근을 시켜 ‘용성·용만형제의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을 담은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하면서 두산가 경영권 분쟁은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두산가(家)에 무슨 일 있었기에 두산가는 국내 기업 중 금호그룹과 함께 가족간 ‘공동경영·공동소유’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던 회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02년 초 박용오 전 회장의 장남인 경원씨가 당시 벤처투자 등으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재미를 보자 ‘독립’을 선언하면서 이러한 원칙들이 서서히 무너졌다.

경원씨는 2002년 3월 두산건설(지금의 두산산업개발) 상무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시 코스닥업체인 CCTV를 제작하는 ㈜전신전자를 인수해 홀로서기에 나섰다. 이는 형제경영을 중시해온 두산가에서 현역 그룹 회장의 장남이 독립해 창업했다는 것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지금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을 예고하는 일종의 시그널이었던 셈이다.

특히 두산건설 출신으로 ‘건설맨’으로 불리던 경원씨가 두산산업개발을 분리독립해 달라는 요구를 하면서부터 다른 형제들로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운영하고 있는 전신전자가 2년 동안 경영실적이 없고 적자폭만 키웠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2년 동안 적자를 보다가 지난해에만 간신히 수익을 냈는데, 그것도 아버지인 박 전 회장이 계열사 보유 주식을 팔아 지원해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실제 박 전 회장은 98년 3.87%이던 ㈜두산지분이 지난해 말 1.7%로 뚝 떨어졌고, 두산산업개발 지분은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결국 경원씨 사업이 계속 어려움을 겪자 박 전 회장은 그룹측에 SOS를 요청했고, 다른 형제들이 거부하자 선친의 유지인 ‘공동소유·공동경영’ 원칙을 무시해가면서 두산산업개발의 계열분리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지난해 박 전 회장과 경원씨는 조용히 적대적 M&A(인수·합병) 를 준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박 전 회장은 M&A를 추진하기 위해 필요도 없는 회장 사무실을 논현동 두산빌딩에 마련해놓고, 직원들에게 두산산업개발의 계열분리를 검토하도록 했다고 그룹측은 설명했다. 그러다 이같은 사실이 발각돼 불발에 그쳤다는 것이다. 박 회장이 “두산사태는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아니라 박용오 전 회장측의 두산산업개발 경영권 탈취 미수사건”이라고 맹비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산산업개발 경영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두산그룹을 사실상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박 전 회장측의 두산산업개발 지분이 0.7%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들은 이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 나머지 형제들은 박 전 회장이 두산산업개발을 분리하려는 움직임 자체를 차단하기 위한 대비를 꾸준히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은 형제간 갈등이 표출되기 직전 두산산업개발이 소유하고 있던 지주회사 ㈜두산의 주식 중 200만 주를 두산엔진과 두산인프라코어에 각각 150만 주와 50만 주씩을 넘겼다. 이는 박 전 회장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두산산업개발의 그룹내 장악력을 약화시켜 박 전 회장의 갑작스런 공격으로부터 그룹을 방어하기 위한 수순이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이에 박 전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 등은 그동안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유용하고 해외밀반출을 해온 것이 나에게 적발되자, 둘이서 공모를 해 일방적으로 나를 회장직에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회장은 이어 “박용성 회장의 그룹 회장 승계는 원천무효”라며 전면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조명]그룹경영권은 ‘피’보다 진하다

명백한 것은 박 전 회장이 장남 경원씨의 몫을 위해 두산산업개발 분리를 요구한 것만은 사실이다. 박 전 회장의 측근은 ‘경영권 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카드가 뭐냐’는 질문에 “두산산업개발을 경원씨가 운용하게 하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밝힌 데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박 전 회장의 ‘돌출거사’에 대한 해명은 부족하다. 일부에서는 두산가의 ‘4세대로의 지분 이동’ 상황에서 박 전 회장의 두 아들이 소외되자 그동안의 누적된 불만을 ‘검찰투서’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회장을 잘 아는 한 측근도 검찰에 그룹경영 의혹에 대해 투서한 것과 관련, “동생(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들을 겁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측근에 따르면 박 전 회장은 검찰투서를 지시하기 이전 ‘동생(용성·용만)들이 하는 짓을 보니 ‘괘씸하다’ ‘이가 갈린다’ 등의 극도의 증오감을 드러냈다고 함다. 특히 사석에서 눈물도 자주 보이면서 “형제와의 갈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순간적으로 눈이 흐려지는 증상도 생겼다”고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측근은 박 전 회장과 ‘박용성·용만’ 형제와의 갈등이 시작된 원인에 대해 “용성·용만 형제가 형인 박 전 회장을 (그룹경영 과정 등에서) 너무 깔아뭉갰다”며 “이런 감정들이 쌓여 폭발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 측근은 “박 전 회장의 장남인 경원씨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형제들이 선뜻 나서주지 않은 것도 이번 갈등이 시작된 원인 중 하나로 본다”고 전했다.

[조명]그룹경영권은 ‘피’보다 진하다

박 전 회장은 외로운 내부 고발자인가 하지만 일부에서는 박 전 회장이 외로운 내부고발자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룹측은 “가뭄에 콩나듯이 두산타워 회장실로 출근해온 박 전 회장이 회사의 자금흐름을 어떻게 상세하게 알겠냐”며 박 전 회장의 주장을 일축했다. 박 회장은 “비자금 등 비리를 조사했다면 담당팀장이 밝혀달라”고 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그룹 회장을 10년간 지냈는데 아무리 얼굴마담이라고 해도 그만한 내부정보는 접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 전 회장은 이와 관련,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이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고 이같은 사실이 발각되자 나를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두산산업개발이 부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자경영을 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회장이 검찰에 제보한 내용도 구체적이다. 박 회장은 태맥이라는 회사를 통해 지금까지 17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미국의 뉴트라 파크를 통해 800억 원의 외화를 밀반출했다는 것이다. 뉴트라파크는 식물성장촉진제를 개발하는 바이오벤처회사다.
실제 두산그룹은 최근 두산산업개발이 박 전 회장의 재임시절의 일어난 일이지만 수천억원의 분식회계 규모를 자진 신고했다. 이렇게 되자 검찰도 “가족간 경영권 분쟁이라 깊숙이 개입하기는 곤란하다”는 당초 입장에서 “혐의자료가 있는 대로 전방위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며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분식회계 그 이상의 ‘비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박용곤 회장측이 박 전 회장측과 극비회동을 추진, 화해를 시도하려 했다는 정황도 포착되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이 두산그룹의 내부비리를 포착, 현 경영진과 갈등을 빚으면서 강제 퇴출됐을 거라는 역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109년 두산그룹 어떻게 되나 이번 두산 형제간 경영권 분쟁 파문으로 더 이상 두산그룹의 ‘공동소유·공동경영’ 원칙은 더욱 지켜지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박 전 회장의 폭로대로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될 경우 창업 109년의 두산그룹은 대외 이미지 실추는 물론, 관련 당사자들의 사법처리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두산그룹은 4세 경영으로 급속히 전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두산그룹은 지주회사 격인 ㈜두산과 두산산업개발,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등 크게 4개 부분으로 분할돼 독립경영 체제로 갈 것으로 점쳐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박용성 회장의 일선 후퇴도 예상된다.

두산가 형제는 모두 29명으로 ‘용’자 돌림의 3세 형제가 7명이고 ‘원’자 돌림의 4세 형제들은 15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두산그룹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4세들은 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원 두산산업개발 부회장과 차남 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박용성 회장의 장남 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 석원 두산중공업 차장 등 9명이다. 실제 박용만 부회장이 경영권 분쟁 이전까지 이들 4세에 대한 경영수업을 시켜 왔기 때문에 당장 그룹 계열사를 맡겨도 문제는 없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박용성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일에 대해 “웃기는 소리”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검찰수사 이후에도 박용성 회장 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두산그룹 고위 관계자는 “박용성 회장이 물러날 경우 그룹을 경영할 대안이 없다는 게 현실적인 고민”이라며 “검찰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밝히고 새로운 두산그룹의 비전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홍길〈서울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what@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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