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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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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행진곡’ ‘조선인민군 행진곡’등 작곡한 항일투쟁가 정율성의 삶

[문화]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정율성(鄭律成, 1914~1976). 그의 이름은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낯설지 않다.

1990년 9월 22일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힘찬 연주로 시작됐다. 300만 중국군이 아침저녁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주요 국가행사 때 어김없이 연주되는 ‘팔로군 행진곡’이었다. 이 곡은 중국에서 국가 ‘의용군 행진곡’ 다음으로 널리 연주된다고 한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은 것은 ‘조선의용군 행진곡’이었다. ‘팔로군 행진곡’ ‘조선의용군 행진곡’은 모두 그가 작곡한 곡이다. 중국 3대 음악가 중 1인으로 추앙받는 그는 13억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항일투쟁가이자 음악가다. 가곡, 합창, 가극, 동요, 영화 등에서 무려 36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한국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다.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가로 생전에 조국과 단절된 시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해방 후 북한에서 5년을 보낸 게 그 이유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8월 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그의 외동딸 딩샤오디 여사(丁小提·62) 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설명회가 열렸다. 11월 11~12일 광주시에서 이곳 태생의 작곡가 정율성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국제음악제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음악제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다. 광주광역시 남구(구청장 황일봉)가 중국문화부 대외문화협력국과 공동 주최한다. 음악제를 앞두고 쑨자정(孫家正·61) 중국 문화부장도 지난 8월 9~10일 광주시를 방문, 정율성의 생가 등을 둘러보고 음악제 관계자를 만나 행사관련 내용을 협의하고 돌아갔다.

고향 광주에서 ‘국제음악제’

노동은 중앙대 교수가 예술총감독을 맡은 정율성 국제음악제에서는 가곡, 합창, 관현악 등 정율성의 대표작 20여곡이 연주될 예정이다. 연주는 중국교향악단합창단(지휘 옌량쿤), 서울심포니(지휘 조정수), 광주시향·광주시립합창단(지휘 유병무), 국립합창단(지휘 김명엽), 피아니스트 임미정(울산대 교수) 등이 맡는다. 정율성이 그의 음악으로 고향 땅에서 다시 소생하는 것이다.

[문화]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만돌린을 즐겨 탔다. 1922년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광주 숭일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축음기가 있던 외삼촌 집에 자주 갔는데 이때 동서양의 명곡을 폭넓게 접했고 이것이 훗날 그의 음악적 자산이 됐다. 소학교 졸업 후엔 역시 기독교계 사립학교로 1919년 3·1운동 당시 전주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폐교까지 당한 전주 신흥중학교에서 수학했다.

중국 건너가 사회주의에 눈 떠

정율성이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그의 나이 열아홉살이던 1933년. 당시 학생을 모집하러 중국에서 조선에 온 넷째형을 따라 상하이로 갔다. 그리고 곧 난징으로 가서 중국에 있었던 한인 항일단체인 의열단에서 운영하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사회주의에 눈을 뜬 그는 1934년 4월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난징에 남아서 항일 비밀활동에 종사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게 되고 이름을 ‘율성’으로 고쳐 부른 시기도 이 즈음이다. 당시 상하이에 체재하던 소련의 유명한 음악교수 크리노와(Krenowa)의 문하에서 성악과 음악이론을 지도받았고 세계 명곡도 두루 접했다. 크리노와는 정율성의 음악적 재질을 높이 평가하면서 “만일 이탈리아에 가서 학습한다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며 이탈리아 유학을 적극 주선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율성은 이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한국의 항일단체 및 중국 공산주의 인사들의 조직에 가담했다. 이름을 바꾼 것과 관련해 그의 아내 딩쉬에송(丁雪松)은 “그는 음악에 몸바치며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것을 결심해 부은을 율성으로 고쳤다”고 회상했다. 1941년 정율성과 결혼한 딩쉬에송은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대장 출신으로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덴마크, 주네덜란드 대사 등 고위 외교관을 지낸 중국인이다.

[문화]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기도

1942년 폐결핵을 앓던 그는 조선인 장군 무정을 따라 태앙산으로 들어가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규합,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을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이때 그가 작곡한 곡으로는 ‘조선의용군 행진곡’ ‘혁명가’ 등이다. 이 가곡들은 화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에서 활약하는 조선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문화]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정율성은 ‘조선인민 유격대 군가’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의 작품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해 9월 아내는 중국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귀국명령을 받고 돌아갔고 같은 해 10월 정율성도 77세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 국적과 당적을 회복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 창작팀과 함께 다시 북한에 들어가 전선에서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지원군십찬’ ‘사랑스러운 군대 사랑스러운 사람’ ‘백운산 노래’ 등을 창작했다. 1951년 4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북경 인민예술극장에서 일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 중앙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 종앙악단 등 중국 최고 음악단체에 근무하면서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으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요’ ‘유쾌한 동년’ 등의 동요도 창작했다. 또 ‘행복한 농장’ ‘추수봉기’ 등 대형 합창곡들과 오페라 ‘망부운’ 및 영화음악과 연극음악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59년 중국의 반우파 정치운동에서 그는 ‘엄중한 우익’ ‘반당(反黨)’이라는 누명을 쓰고 비판을 받았고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일생을 바쳤던 창작활동의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그의 작품은 방송, 연주, 출판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1976년 10월 소위 사인방이 분쇄되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정율성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군 50주년을 위한 대형작품 창작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해 12월 7일 뇌일혈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가 숨지자 왕전 등 중국 공산당 정부의 최고위 인사들의 조문이 잇따랐다.



인터뷰 / 정율성의 딸 딩샤오디씨

“아버지 음악이 상호이해의 통로됐으면”

[문화]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북한에서의 기억도 물론 있어요. 제가 유치원을 그곳에서 다녔는데 제가 유치원이 끝나면 강변에 나와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함께 집에 돌아가곤 했거든요.”
그는 “아버지에 대한 중국의 예우는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한 예로 중국 문화부에서는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를 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적극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그는 “이미 중국에서는 아버지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7번 정도 열렸는데 공연을 관람한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딩샤오디씨의 한국방문은 이번이 8번째. 그는 “이번 방문에서는 정율성국제음악제 관련해 문광부 장관 미팅과 기자회견, 정율성준비위원회 출범식 등에 참석했고 중국 문화부장 방한 미팅 및 진행과정에서 한국과 중국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중국에 돌아가서는 중국에서 정율성음악제에 참가할 중국 교향악단을 선별하고 조직위와 논의해 아버지의 음악 중 합창단이 부를 노래를 선곡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음악제가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알아가는 통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중국 문화부장도 내년, 후년에도 계속 문화행사를 해서 많은 나라들이 참가해 서로의 우의가 증진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또 한국의 도시 광주를 알게 된 만큼 중국의 문화도 한국에 소개된다면 좋을 것 같아요.”
딩샤오디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바로크합창단장을 맡고 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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