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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이 경향신문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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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지시로 정보부가 저지른 정치공작”… 비판 언론에 재갈물리기

[포커스]독재정권이 경향신문 빼앗았다

언론자유의 조종(弔鐘)을 울린 사건이면서도 온갖 의혹에 싸인 채 잊혀져가던 경향신문 강탈의 ‘보이지 않는 손’이 40년 만에 실체를 드러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지난 7월 22일 기자회견을 갖고 경향신문 강제매각 및 부일장학회 등 강제헌납의 조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지난 2월 국정원의 과거사 우선조사 대상으로 선정, 국정원 보관자료 분석과 사건 관련 생존자들과의 면담조사 등을 광범위하게 진행한 지 5개월여 만이었다.

정경유착 기사 박정희 심기 건드려

조사 결과 경향신문 강제매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진두지휘해 벌인 정치공작이었음이 확인됐다. 그 배경에는 박 전 대통령과 경향신문의 악연, 독재정권의 기반 안정과 1967년 3선개헌 등의 장기집권 환경 조성을 위한 언론장악의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진실위 발표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의 회고록 등을 토대로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해보았다.

[포커스]독재정권이 경향신문 빼앗았다

1946년 창간한 경향신문은 1950년대와 1960대 초반 반독재 언론의 대명사였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가 1년 만에 복간될 정도의 ‘고집 센 비판언론’은 박 정권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필봉을 휘둘렀다. 5·16 군사쿠데타에 이은 군정과 제3공화국 체제의 혹독한 언론통제 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1964년 5월 ‘허기진 군상’ 등의 시리즈를 통해 도시 영세민들의 비참한 삶과 정경유착 실태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시리즈 기사는 가난한 농촌과 영세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절박한 삶을 생생하게 고발하는 내용으로 정권을 크게 자극했다. 같은 해 6·3 사태에 따른 계엄령 선포로 연재가 중단된 이 기사는 박 대통령을 격노케 해 결과적으로 강탈의 단초가 됐다.

박 정권의 경향신문 강탈작업은 ‘색깔 칠하기’로 신문의 이미지를 덧칠한 뒤 채권단을 동원, ‘경매처분’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형식으로 치밀하게 진행됐다.

1964년 5월 이후 경향신문은 잇단 반공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융단폭격’을 받는다. 정권은 독자설문 관련 기사의 이적성 등에 시비를 걸어 편집국장과 기자 등 모두 7명을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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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법으로 사장·기자들 구속시켜

또 6·3 계엄 선포 다음날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허기진 군상’ 시리즈를 문제삼아 당시 이준구 사장과 손충무 기자를 연행,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장은 1965년에 또다시 반공법 혐의로 구속된 뒤 끝내 경향신문을 내놓게 된다.

그의 재판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 대통령은 김형욱 부장을 청와대로 불러 “이제 이 사장이 경향신문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하라”고 지시한다. 김 부장은 이후 감찰실과 대공활동국, 서울분실 등의 경쟁을 부추기며 본격적인 매각 공작에 돌입했다. 당시 간부 ㅂ씨는 진실위 면담조사에서 “김형욱 부장의 지시를 받아 경향신문건에 개입했고, 사전에 시나리오를 만들어 이 사장 부부에게 경향신문을 포기하도록 심리공작을 전개했다”고 증언했다.

경향 강탈의 시나리오는 용의주도했다. 1965년 9월 경향신문의 채권단인 한일은행 등 3개 시중은행은 은밀하게 경향신문 사옥과 윤전기 등에 대한 경매신청을 했다. 당시 경향신문의 부채는 4627만 원으로 다른 신문사의 최소 1억 원대 빚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채권단은 경매신청에 앞서 유독 경향신문에 대해서만 채무 전액을 일시에 상환하라고 통고했다. 여기에도 물론 중정 간부들이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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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경매 부쳐 제3자에게 양도

결국 경향신문은 1966년 1월 25일 단독 응찰자였던 기아산업의 김철호 사장이 써낸 감정 최저가(2억1000여만 원)에 낙찰됐다. 언론기관이 경매를 통해 경영권이 제3자에게 넘어간 것은 한국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기아산업이 법정관리 중인 것을 감안하면 자금원은 박 정권이었으리라는 게 진실위의 추정이다.

이후 이 사장측이 매각에도 불구, 주식 양도를 거부하고 버티자 중정 관계자들은 “사형당한 후에 정신을 차리겠느냐”고 협박했다. 김형욱 부장은 직접 이 사장의 부인 홍연수씨를 압박한 끝에 이 사장을 무죄석방하는 조건으로 주식을 양도받는다. 실제 이사장은 직후 2심 판결에서 국보법·반공법 혐의에 무죄로 풀려나왔다.

강제매각 후 경향신문은 당시 송건호 편집국장의 진상조사 청원서 제출 등과 함께 “최후까지 투쟁하겠다”는 요지의 사설을 게재하는 등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경향신문은 권력 비판지라는 빛을 잃고 침체기를 보내다 결국 1974년 문화방송에 인수합병되는 형식으로 5·16장학회의 재산 리스트에 오르는 처지가 됐다.

<정치부/이재국 기자 nostalgi@kyunghyang.com>




당시 국회서 정치공작 폭로한 김상현 전 민중당 의원

“정권의 후안무치 참을 수 없었다”

경향신문 강제매각이 박정희 정권의 주도면밀한 정치공작에 의해 진행됐다는 것을 국회에서 폭로했던 김상현 전 의원(당시 민중당)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정권의 만행에 대해 당연한 비판을 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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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록에 따르면 “(중정 5국 김모 차장이 이 사장의 부인에게) 신문사를 손에 넣어야 이 사장을 내놓겠다. 매매계약서와 바꾸자” “(중정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두 가지 다 잃는다. 징역가고 신문사도 운영하지 못하고…”라며 협박한 것이 나타났다. 또한 “경매하면 사려는 사람이 있겠는가. 어림없다. 누가 입찰하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쇼’를 하는 것처럼 입찰할 것이다”라며 ‘사전각본’에 따른 경매를 시사하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공개 직후 중정 김형욱 부장이 전화를 걸어 ‘나하고 원수졌나. 가만히 좀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녹취록 공개 전에도 중정 간부가 찾아와 ‘경향신문에 대해 참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중정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장의 부인이 다른 의원들은 녹취록 공개를 다 꺼리고 있다며 좀 도와달라고 찾아왔는데 녹취록을 들어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공개하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부가 나서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며 “국회의원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 돌이켜봐도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국정원의 발표와 별도로 이준구 전 사장이나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경향신문 기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정부의 경제적 보상절차도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단순한 사실관계 확인이 아니라 진실을 밝힌 뒤 과거 정부의 잘못에 대해 이후 정부가 책임을 질 때 완전한 진실규명과 화해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부/조현철 기자 cho1972@kyunghyang.com>




경영권 잃은 이준구 사장의 부인 홍연수 여사

“경향신문 명예회복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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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도 당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을 회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홍 여사는 당시 중정 김형욱 부장과 일부 요원을 ‘원수 같은 놈들’이라고 표현했다. 신문사와 중정에서 협박과 폭언을 일삼던 중정 고위간부들, 남편과 신문사 직원의 석방과 경영권 양보를 교환하자는 일방적 제안, 심지어 주식을 찾기 위해 집안과 회사를 샅샅이 뒤지던 장면 등 박 정권의 언론사 장악기도는 추악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이다. 홍 여사는 “정권차원의 광고탄압이 시작됐고 구속된 남편과 신문사 직원을 살리려면 시키는 대로 경영권을 매각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원수’들이 다 죽고 나니 새삼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홍 여사는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된 과거사 고백이 ‘이벤트’나 단순한 사실관계 확인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홍 여사는 “당시 정권과 지금 정권이 다르긴 하지만 범죄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신문사를 강탈했다는 것을 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니 원상회복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군사정권을 지켜본 세대들은 경향신문의 위상을 잘 알지만 요즘 세대는 경향신문의 역사적 가치를 잘 모른다”면서 “잊혀진 경향신문의 문패를 바로 잡기 위해 명예회복과 적절한 경제적 보상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끝으로 홍 여사는 “병석에 있는 남편도 경향신문의 과거사 회복 보도를 듣고 이제는 한이 풀렸다는 표정이었다”며 “경향신문의 비판정신을 계속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기획취재부/조현철 기자 cho197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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