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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사회가 ‘인간폭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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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뒤처졌다는 피해의식이 분노 일으켜… “아이들에게 놀이를 허락하라”

[특집]자극적인 사회가 ‘인간폭탄’ 만든다

그 소년의 심리상태에 대해 신경정신과전문의 김병후씨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불행한 엄마를 도울 길이 없는 좌절감이 표출된 것”이라며 “미국 학생들의 총기난사 사건처럼 우리나라도 곧 분노성범죄나 불특정인에 대한 범죄가 급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각종 범죄들의 특성을 보면 쪽집게 수준의 예견이다.

6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유영철의 정신감정을 맡았던 김무진 공주치료감호소 소장은 “유씨의 연쇄살인은 주변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스스로의 열등감과 불우한 가정환경에 대한 반감의 복합적인 표출”이라고 밝혔다. 유영철은 정신병자가 아니라 아버지·형이 연이어 죽고 자신은 이혼 후 아들 양육권까지 뺏겼는데 동거녀마저 떠나자 주변에 대한 배신감에 극단적인 폭력성이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동거녀와 잘 지내던 시절에는 연쇄살인을 멈춘 것 등이 이를 입증한다.

조금만 길이 막혀도 시끄럽게 울려대는 클랙슨, 과격 시위현장, 심야 취객들이 퍼붓는 욕설, 거의 저주에 가까운 네티즌들의 댓글들을 읽다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집단 분노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 동방예의지국에 유순한 민족성을 자랑하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예비범죄자가 되고, 서로에게 시한폭탄과 지뢰밭이 되어가는 걸까. 왜 주변에서 ‘조용한 청년’이라고 평가받던 김 일병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살인범이 되었을까.

패스트푸드=분노 덩어리?

심리학자인 최창호 박사는 “음식에서부터 대중문화, 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너무 자극적인데다가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경쟁에 뒤처진 이들이 느끼는 막연한 피해의식이 분노의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소박하고 담백한 천연 음식만 먹던 우리가 이젠 햄버거 등 각종 정크푸드나 인스턴트 식품, 화학조미료로 만든 음식에 길들었다. 미국을 비롯, 각국의 임상연구조사에 따르면 이런 음식에 들어간 살리신염 등은 기질을 바꾸며 소년범들의 경우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는 이의 범죄율이 높았다

또 이젠 정보의 속도와 양이 개인의 부와 능력을 좌우하는데 변화의 스피드를 못 따르거나 정보를 얻지 못한 이들은 각종 경쟁에 뒤진다는 불안감과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 돈 있고 ‘빽’ 있는 친구는 신체 튼튼해도 군대도 안 가고 나는 심신이 약한데도 최전방에 배치받고, 못생긴 친구는 성형수술로 얼굴 바꿔 취직도 되고 멋진 남자도 만나고 나는 여전히 백수 신세, 비슷한 시기에 동료는 강남 아파트를 사서 수억 원을 벌고 나는 직장 가까운 곳에 샀는데 그대로고… 이런 상황들을 보며 피해의식을 느끼고 주변과 사회에 울분이 가득한 이가 너무 많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조건 출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기적성을 못 찾고 남들이 보기에 최고의 자리만 고집합니다. 실력이 안 되는데도 다들 의사, 변호사, 박사 등이 되려고 하니까 정작 그 분야의 전문가가 못되고 사회적으로 뒤처진다는 생각에 나보다 잘난 이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되는 겁니다.”

최 박사는 분야별로 자기 능력을 개발할 시스템을 갖춰 각자가 사회적 존재로서 할 일과 보람을 찾게 되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사회에 대한 불안감도 해소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찾으면 만족감을 느끼고 다른 이의 전문성도 존중하게 되어 피해의식이 없어진단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병후씨는 “누구나 똑같은 피를 나눈 한겨레, 단일민족이란 특성과 문민정부 이후 물꼬가 터진 ‘평등의식’이 ‘분노’의 원천”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평등과 정의에 대한 착각

“단군의 후손을 강조하는 우리는 모두 한핏줄, 즉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다 같은 옷 입고 같은 음식 먹고 수준이 비슷해야 안심합니다. 예전엔 다들 못살았으니까 빈부격차도 크지 않고 서로 떨어져 살아 잘 몰랐지만 이젠 정보도 빠르고 밀집화된 상태에서 각자의 모습을 너무 빤히 아니까 좌절하거나 화가 치밀게 됩니다.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가장 평등한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이 한국입니다. 교육, 집값, 외모, 임금 등 모든 면에서 평준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보수적 사회분위기와 군사독재에 억눌려 있던 사회에 대한 모든 분노가 ‘평등’과 ‘정의’를 내걸고 표출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특징이란다. 이런 평등에의 요구가 때로는 극단적인 상황에선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 평등이 모두 다 같이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억지로 올라가기와 딴지걸기로 나타나 또다른 경쟁을 만드는 것이 문제라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내가 못가진 것을 빼앗아 평등하게 나누는 것, 나를 무시한 이들을 응징하는 것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이 시간에도 투서를 쓰고 유괴를 하고 동네에 불을 지른다.

아동심리연구가인 김영미씨는 부모들이 ‘놀이’를 빼앗은 것이 사회범죄 증가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감정순화를 통해 분노를 치유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유지한다. 즉 재미있게 놀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며 정서가 순화된다. 그러나 욕심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서 엔돌핀이 나오는 즐거운 ‘놀이’를 빼앗고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버렸다는 것.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기대만 커서 무조건 공부하라고만 하지 놀이터에서 놀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 공간과 시간을 주지 않지요. 학업, 각종 경시대회는 물론 사소한 싸움에서도 지면 무조건 아이를 비난하니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경쟁과 원망에 가득 찬 정서적 문제아를 양산합니다.”

또 드라마, 영화, 게임은 물론 뉴스에 나오는 모든 사회상들 역시 비난·질타·싸움 일색이다. 드라마 속 멋진 주인공들도 수시로 화내고 정치인들은 멱살잡이를 하며 천박한 욕설을 퍼붓고 부모들도 툭 하면 싸우고 돈만 강조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아, 어른들의 생활은 저런 거구나”라며 그대로 행동하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한다.

그렇다면 치유책은 무얼까. 가정치료를 담당하는 하이패밀리 송길원 목사는 “인간(人間)이란 글자를 보면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받쳐주고 간격을 유지해야 진정한 사람”이라며 “서로 돕고 각자의 개성을 인정해주는 인간의 기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정에서건 정치현장에서건 분노에 찬 어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싸우지 않으려면 서로 사이좋게 노는 것이 기본. 건강하고 즐겁게 놀아서 기쁘고 행복해지는 이가 많아져야 타인에 대한 분노·증오와 피해의식도 사라지고 분노로 인한 범죄 역시 사라진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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