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사회적 대타협 ‘응답하라 20대 국회’

사회적 대타협이란 이익집단-국가 간의 정치적 교환을 통해 노사 등 이해집단들의 이익·가치 갈등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사회적대타협의 성공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소야대가 된 20대 국회가 대타협의 물꼬를 틀지 주목된다.

재벌의 낙수효과에 기초한 성장 모델은 한국 경제의 지배논리였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위기를 보여주는 숫자들은 이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청년실업은 지난해 10.1%로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가계부채는 1200조원을 넘었다. 성장의 과실이 가계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간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국내총투자율은 1998년 외환위기 때 27.9%로 급락한 후 2006~2008년 33% 수준으로 잠깐 올라갔다가 2015년 28.5%로 다시 주저앉았다.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멈췄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한 성장률은 박근혜 정부 들어 2%대로 떨어졌다. 조선업에서 시작한 위기는 산업 전반으로 퍼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존의 성장체제로는 더 이상 한국 경제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기업집단별 부실징후기업 비중은 2010년 이후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이처럼 한계기업이 증가하고 대기업 집단에서도 부실징후기업들이 증가하는 것은 재벌 대기업과 수출 제조업 위주 체제에 의존한 기존의 성장체제가 한계에 왔다는 것을 함의한다. 즉 재벌기업들이 창의적 제품 개발과 유기적 산업생태계 구축에 집중하기보다는 손쉬운 돈벌이와 사업기회 편취, 불공정 거래를 통한 총수 일가의 사적 편익과 승계에 치중한 결과다.”(‘부실기업 실태와 구조조정 절차의 개선 필요성’, 하준, 2016)

정치권의 진단도 이와 같다. 20대 총선을 앞둔 지난 2월 1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책 발표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정 대기업집단 위주로 성장하는 게 지난 50여년 동안의 성장전략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경제위기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노·사·정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공약이었다. 사회적 대타협이란 시민사회-시장-국가 사이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수평적 의사결정 패러다임이며, 이익집단-국가 간의 정치적 교환을 통해 노사 등 이해집단들의 이익·가치 갈등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지난 총선에서 더민주의 총선전략을 담당했던 핵심 관계자는 이번 선거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유권자가 소위 보수의 ‘산업화 귀족’이든 진보의 ‘민주화 귀족’이든 양쪽 세력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20대 국회는 그런 흐름 속에서 근본적인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게 구조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양극화와 격차 문제를 해결하고 재벌들이 한국 경제위기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20대 국회 초선 당선자들이 5월 1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전자투표 방법을 교육받은 뒤 기자들의 요청에 뒤돌아 손을 흔들고 있다. / 권호욱 기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
20대 국회는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아 보인다. 국회가 중심이 돼 사회적 대타협을 시도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6년 고 김근태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할 당시 사회적 대타협을 제안한 바 있다. 김 전 의원은 ‘저성장’과 ‘양극화’로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며 새로운 국가발전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이 제시한 대타협 모델은 대기업이 일자리 창출과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를 해준다면 그동안 재계가 요구해온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 등을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김근태계’로 분류되는 기동민 더민주 당선인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 김근태 의원은 각 사회·경제주체들 간 타협의 틀거리를 만들어 재벌에게 경영권 보장문제 등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부분을 일정하게 보장해 주고, 반대로 사내유보금이라든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쌓아둔 돈을 일자리 창출이나 서민경제 활성화에 쓰일 수 있도록 큰 틀 차원의 협정을 맺고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결국 대내외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대타협은 이뤄지지 않았다. 기동민 당선인은 이를 청와대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난관이 있었다. 민주노총은 노동 중심성을 이야기했다. 전경련·경총 등으로 논의를 확대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청와대와 마찰이 있어서 결국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걸 실행하고 말고는 청와대의 의중에 있는 것인데, 대통령이 키를 쥐고 풀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기 당선인의 말대로 사회적 대타협은 주로 정부 주도로 이루어져 왔다. 노사정위원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는 노·사·정이 결코 평등하지 않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으로 있었던 박영삼 전 기획위원은 지난해 있었던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에 대해 정부가 방향과 결론을 정해놓고 진행한 대타협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처음부터 방향과 결론을 정해놓고 압박을 했다. 노동계가 충분히 반대할 만한 민감한 파견법과 기간제법의 개정 방향을 정해놓고 언론을 총동원해서 광고를 하고 기획기사를 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대타협을 잘하려고 해도 안될 수밖에 없다. 노동계를 굴복시키려고 했던 분위기였다.” 김 전 기획위원은 “정부가 무리하게 결론을 내리고 압박을 하면 안 되고 대기업이나 재벌 등 기득권층도 양보를 해야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기업에 ‘노동계의 양보를 받아주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때부터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해 왔다. 대선후보 때는 ‘경제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 기구’ 설치를 약속했고, 당선인 시절 한국노총을 찾아 일자리 만들기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14년 4월에는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조세-복지의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초당적인 ‘비전2040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여당은 이해관계가 상충해 정치·사회적으로 풀어내기 민감한 문제나 시대적 과제 앞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내밀었다. 그러나 정부가 제안하는 사회적 대타협이 그 뜻에 걸맞게 수평적 논의기구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결실을 맺은 적은 없다.

정부 주도의 ‘기울어진’ 노사정위원회
선학태 전남대 교수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재벌·대기업은 사회적 대타협에 참여해야 할 동기를 느끼지 못한다며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재벌·대기업은 야권 정당블록의 정치력을 견제해야 할 절박함을 갖지 않는다. 재벌·대기업이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규범을 공유한 새누리당-박근혜 정부를 상대로 한 로비정치를 통해서 이익 관철을 달성하는 데 정치적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가 대선 당시 공약했던 재벌개혁 복지정책을 파기하고 경제활성화를 내세우며 규제와의 전쟁을 선언한 것은 ‘자본 스트라이크’(투자·고용 축소, 생산기지 해외이전 등) 위협을 압박무기로 활용할 위치에 있는 재벌-사용자단체의 집요한 유·무형 대정부 로비 정치에 기인한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성공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박근혜 정부 이후 그 의미마저 오염되고 있는 상황에서 20대 국회가 기득권의 양보를 얻어낼 사회적 대타협의 매개가 될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몇 가지 가능성은 있다.

우선 지역 중심의 양당 독과점 정치지형이 무너진 20대 국회에서 민생정책 선점과 이를 바탕으로 한 협치는 강제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의 말이다. “20대 국회는 갈등 이슈를 전면으로 끌고가지는 못할 것이다. 본질적인 협치까지 가능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외형적 협치는 가능할 것이다. 민생정책을 선점하고 이를 바탕으로 협치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야당은 가질 수밖에 없다.”

20대 총선을 통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계파가 일정 부분 해체되고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된 것도 사회적 대타협을 만드는 데 유리한 국면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변화된 야당 내부의 구성이 역동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전 총선전략 핵심 전문가의 말이다. “김종인 대표 측과 386·친노그룹의 갈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양상은 이전 계파 갈등보다 진일보할 것이다. 의원들이 정권 탈취 기계가 돼 누구를 따를 것이냐는 멤버십으로 갈등하지 않고 어떤 노선과 정책을 가지고 있느냐로 부딪히는 흐름으로 바뀔 것이다. 김종인 대표가 갖는 장점은 상층부 경제권력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 성격이 강해 기존 야당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걸 푸는 방식이 매우 비굴하거나 타협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있을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 진일보했다.”

국회 주도로 사회적 대타협이 성공한 경험은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한다. 19대 국회의 주요 성과로 평가받는 공무원연금개혁안 통과는 국회가 주도한 최초의 사회적 대타협이었다. 2014년 10월 정부가 갑작스럽게 공무원연금 이슈를 제기하면서 정부와 공무원단체 간의 대립은 점점 고조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부와 여당에 국민 대타협기구를 제안했고, 여야가 대타협기구 내 공동위원장과 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 모든 논의과정에 참여했다. 그 결과 공무원 단체와 정부 간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 개편안의 합의가 도출됐다. 박태주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위원장은 작은 성공 모델이 쌓이면 신뢰가 형성되고 그 신뢰를 기반으로 큰 타협도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합의에 대한 이론은 여러 가지다. 그 중 하나는 사회적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그 조건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별체제다. 노조가 산별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합의가 이뤄졌을 때 아래에서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를 대변할 수 있는 강력한 진보정당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조건 중 하나다.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한국은 사회적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건이 부분적으로 갖춰져 있지 않더라도 주체가 전략적이면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이론도 있다. 엄청난 노사분쟁에 시달렸던 스웨덴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모든 조건들이 갖춰져서라기보다는 상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는 작은 협약들을 맺고 이행해가면서 합의가 가능하다는 분위기를 만들고 예측 가능성을 높였을 때 생긴다. 그럴 경우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더라도 큰 타협이 가능해진다.” 그런 만큼 국회가 주도해 성공한 공무원연금개혁안 사례는 신뢰의 토대가 될 수 있다. “국회가 주도해 여야, 정부, 외부전문가, 노조 등 여러 단체가 들어가는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었다. 누구도 안 된다고 봤던 공무원연금개혁안이 거기서 합의가 됐다. 국회가 주도하니까 사회적 합의가 되는구나라는 경험이 생겼다. 더군다나 당시는 여대야소 구조였다. 20대 국회에서는 여소야대가 된 만큼 국회가 주도하는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3월 25일 조원진(새누리당, 왼쪽), 강기정(새정치민주연합) 공동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공무원연금개혁 국민대타협기구 대표자회의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실질적 결실 없는 박근혜 정부의 대타협
20대 국회의 사회적 합의의 첫 시험대는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에 대한 대책 마련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조선산업 구조조정 및 고용문제와 관련해 국회 차원의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을 제안했다. 목소리가 대변되고 있지 않은 비정규직도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일단 노동의 몫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계의 목소리와 궤를 같이한다. 더민주는 ‘근로자 경영 감시’ ‘대주주 법적·경제적 책임’ 등 구조조정 이슈와 경제민주화를 결합한 정책을 제도화할 방침을 세웠다.

물론 여전히 남은 문제는 있다. 대선 레이스가 조기 과열되면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정치권이 회피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선학태 교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대선을 앞두고 누가 주도적으로 의제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민병두 더민주 의원은 “조기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사회적 대타협이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제대로 추진력을 얻지 못할까봐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이후 정책 노선 갈등이 끊겨버린 새누리당이 20대 국회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생산적인 논의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는 “지난해 유승민 전 원내대표 때만 해도 새누리당은 보수의 방향 등 정책 노선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편가르기, 친소관계로 논쟁이 이어진다. 새누리당 내부는 보수의 혁신 가치는 사라지고 사람 한 명 한 명을 놓고 이 사람이 누구 편이냐를 두고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향후 전당대회에서도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싸움에 골몰하면서 당장의 당내 투쟁에 급급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대기업 중심의 성장, 대마불사, 승자 독식 구조는 한국 경제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성장모델이다. 어떻게 경제를 재분배하고 경제권력을 재조정해야 하는지를 묻는 시대적 과제에 20대 국회는 응답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만들 사회적 대타협의 물꼬를 20대 국회가 만들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