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지금까지 대타협은 왜 실패했나

정부와 재계가 손잡고 노동계 길들이기 수단으로 활용 사회적 합의 못 끌어내

정리해고, 파견법, 교원 및 공무원 노조 합법화, 주5일제, 복수노조 허용 등의 공통점은 ‘노사정위원회’를 거쳤다는 점이다. 2000년대 이후 노동자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굵직굵직한 노동정책은 ‘사회적 대화기구’이자 ‘자문기구’인 노사정위를 거치지 않고는 통과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조치가 ‘노·사·정 대타협의 산물’로 인식되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적 대타협’은 왜 부정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

사회적 대타협은 현재는 진보적 지식인이나 노동계에서 주로 주장하는 이슈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사정은 달랐다. 노사 간의 문제를 ‘사회적 대타협’으로 해결하자는 목소리는 재벌 쪽에서 먼저 나왔다. 김영삼 정권 시절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 중심의 ‘노·경총 사회적 합의’, 1996년 소위 ‘신노사관계 구상’을 중심으로 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대표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한국의 전투적 노동운동과 노사갈등이 국제경쟁력의 위협요인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재계의 핵심 요구사항은 ‘한 자릿수 임금인상’. 노태우 정권에서도 하반기 경제종합대책을 발표하며 ‘한 자릿수 임금인상률’을 발표할 정도였다. 군사정권 내내 억눌린 임금인상 요구가 1987년 민주화 이후 터져나온 탓이었다.

IMF위기 국면 노사정협의회 출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사업장 내 복지기금 확대, 정부의 소비자물가 억제 노력과 고용보험 실시, 한 자릿수 임금인상률에 합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대타협은 실패했다. 1995년 임금인상률은 11.2%를 기록했다. 1994년 11월에는 현 민주노총 전신인 민주노조 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박성인 한국노동이론연구소 부소장은 <진보평론>에서 “대부분 생계비를 임금에만 의존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획기적인 사회보장 정책과 물가안정 없이 임금억제를 수용할 수 없었고, 노동자들은 사회적 합의의 주체인 한국노총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은 IMF 외환위기 국면에서 부각됐다. 한보·대우·진로 등 주요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나는 상황에서 노동계와 재계는 동시에 ‘구조조정 공포’에 떨었다. 정부는 IMF가 주문한 구조조정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한국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는 대전환을 하는 만큼 정치적 책임이 컸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 시절 당선자 지시로 노사정협의회가 출범했다.

경제학자 이덕재 박사(한국고용정보원 고용서비스진흥팀장, 전 노사정위 자문위원)는 “사회적 대타협은 외부적 충격에 집단대응하는 전략으로, 경기가 하강하는 국면에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핀란드,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 ‘사회적 협약모델’을 강조하는 국가들은 유럽에서도 대외경제 의존도가 높고 개방적인 국가들이다. 노조 조직률이 높고 사민당 등 노조와 강력하게 연계된 정당이 있어 노조와 기업이 한 테이블에서 협약이 가능했다”며 “한국의 경우 대외경제 의존도는 높은 반면에 노조 조직률이 낮고 군사정권 시절 ‘협약’의 경험이 거의 전무한 데다, 재벌 중심 경제라는 특이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대타협은 필요하지만 사회적 대타협에 필요한 조건은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 결과 사회적 대타협은 위기상황에서 정부와 재계가 손잡고 노동계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2008년 <경제학연구> 56집에 실린 이덕재 박사의 논문 ‘한국의 사회적 합의에 관한 경기변동론적 고찰’을 보면 사회적 대타협이 부각되는 시점은 경기변동과 긴밀하게 연동돼 있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도 오일쇼크의 여파로 노사간담회(1975년), 중앙노사협의회(1980년)라는 명목상의 기구를 설치했다. 노·경총 사회적 합의(1990년), 노·경총 임금 합의(1993~1994년)는 3저 호황이 끝나고 경기가 후퇴하는 시점과 관련이 있었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노사문제 외에도 재벌개혁, 구조조정, 금융개혁 등 광범위한 이슈가 다뤄졌다. 90건의 합의사항 중 35건이 재벌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계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통로가 마련됐다. 정부·사용자는 노동계로부터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이는 대신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자유, 전교조 합법화, 공무원 단결권 등 노동기본권을 보장했다. 2기 노사정위는 대통령령을 통해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라는 법적 실체를 얻었다. 그러나 실제 구조조정에서 노동계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은 노사정위 활동에 대해 2003년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민주노총이 애초에 노사정위원회에 부여했던 적극적 의미보다는 정권이 의도하는 정리해고 법제화로 모든 중심이 이동됐다.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에 대한 민주노총의 핵심 요구사항은 대부분 2차 개혁과제로 유보됐다. 제2기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합의사항이 지켜지지 않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55개 퇴출기업 발표(6월 18일), 5개 퇴출은행 발표(6월 29일),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신고(6월 30일), 11개 공기업 민영화 계획안 발표(7월 3일) 등 일방적 구조조정이 강행됐다.” 1999년 2월 24일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결정했다.

2015년 3월 노사정위원회 김대환 위원장과 위원들이 정부서울청사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선 특별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있다. 노사정위는 대타협 시한을 하루 앞두고 합의문 초안 완성을 목표로 막판 조율을 시도했다. / 강윤중 기자

민주노총 불참으로 대표성 잃어
노무현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법적 기구로 격상시키고 상설 기구화하려고 노력했다. 주5일제, 비정규직 등 굵직한 이슈가 노사정위를 거쳐 합의된 것도 이 무렵 이후부터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불참한 상태에서는 대표성을 얻기가 어려웠다. 반면 한나라당에서는 노사정위 폐기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유명무실한 존재로서 노동계와 재계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빈약한 합의 전통과 낮은 노조 조직률, 미약한 진보정당 등의 여건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기구가 자리 잡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보수정부인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자 노사정위는 더욱 사문화될 것으로 우려됐다. 하지만 2007년 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노사정위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오히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외연을 확대했다. 2009년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를 도출하기도 했다. 쌍용차, 한진중공업 구조조정 등 개별 사업장의 문제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지역단위의 사회적 대화를 위한 지역노사민정협의회로 옮겨가면서 새로 출발했다. 전국 246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110개 지역에 지역 노사민정협이 설치됐다. 지역위에서는 민주노총도 참여해 대표성 문제를 일부 해소하고 있다.

이덕재 박사는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도 사회적 대타협이 제도적으로 가능한 조건이 됐다고 보고 있다. 십수 년 동안 노하우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경제구조의 변화와 사회적 인식도 달라졌다. 과거 한국의 위기는 주로 수출의존 경제에서 오는 단기적으로 유동성 위기만 해결하면 됐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저출산과 고령화 등 자본과 노동 등 어느 한 경제주체가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위기가 있어 사회적 대타협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 이 박사는 “의회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곳인데, 제도를 만들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보게 돼 있다. 국회에서 이해관계 충돌에 직접 휘말리면 합의가 되지 않는다”며 “노사정위가 법적 강제력이 없다 하더라도 논의를 통해 충분히 의견을 숙성시켜주고 의회에 전달하면 훨씬 더 의회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타협하기가 쉬워진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j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