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13) 자신의 답 대신, 다른 답도 승인해주자

“음료수 좀 사와!”

어린시절 어른들에게 가끔 들었던 말이다. 이런 심부름을 하게 될 때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무슨 음료수요?”

답을 확실히 들으면 좋겠지만 아닐 때도 있다. “네가 알아서 사와.”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어른은 아이에게 결정권을 내준 것인데 아이로서는 난감해질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음료수를 원하는 거지?’ 알아서 사오는 건 일종의 내기가 된다. 맘에 드는 것을 사온다면 알아서 척척 잘하는 똑똑한 아이가 될 것이고, 맘에 안 드는 것을 사온다면 그런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변변치 않은 아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중년 이상의 세대에서 청년들을 보면서 혀를 찰 때가 있다. ‘음료수를 사오라’는 것을 포함해 어떤 일을 알아서 하라고 맡겼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세하게 알려줄 때까지 꼬치꼬치 되묻거나 심지어 한술 더 떠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결정해달라고 도움을 청해버린다고 불만을 말한다.

“알아서 음료수 좀 사와”의 숨은 뜻

성인이라면 당연히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맞는 말이다. 아이는 어른이 대신 선택하고 결정해주는 의미의 세계에서 조금씩 벗어나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정말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쉽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각자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나에게 스스로 결정하라고 주어지는 기회는 사실 그 뒤에 숨은 뜻을 품고 있다. 스스로 결정하되 사회적인 관계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료수를 알아서 사와”라는 말은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 알아서 ‘적절한 것’으로 사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무엇을 요청하면 항상 동일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때때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음료수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도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때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가장 편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선택지가 소위 요즘 청년들이 많이 한다는, 집요하게 ‘당신이 원하는 음료수’가 무엇인지를 되묻는 것이 된다. “정확히 뭘 사다 드려요?”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해결책이 있다. 그 답을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 “엄마, 이럴 땐 뭘 사다 드려야 해요?”

그런데 “네가 알아서 사오라”고 했던 어른은 정말 뭘 바라고 그 말을 했을까. 거기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맞춰봐’라는 요청이다. 말하자면 원하는 음료수가 이미 있는데, 네가 그걸 알고 있는지 한번 보겠다는 시험이다. 눈치껏, 똑똑하게 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모순적이게도 ‘알아서 사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음료수’를 맞춰서 사와야만 하는 것이 된다. 자유로운 결정권을 준 것이 아니라 내 뜻에 순종하라는 요청이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만약 요청을 한 사람이 이런 의도를 갖고 있다면,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음료수 이외의 다른 모든 음료수는 제대로 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꼬치꼬치 되물어 원하는 답을 직접 알아내는 것, 어른들이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던 그 방식이 조금이라도 덜 순종적인 응답의 형태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당신이 원하는 것(내가 당신의 뜻을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삼지는 않겠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예 개입시키지 않을 테니 그냥 당신이 원하는 것을 밝혀달라는 태도니까 말이다.

“그럼 네 생각을 말해봐”, 하지만

상담자 중에 이런 태도를 보인 사례가 있었다. 상담자의 부모는 겉으로는 늘 너그럽고 자유를 허락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 네 생각을 말해봐”,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우리는 만족해”. 하지만 사실은 매우 엄격했고, 자신들이 이미 정해놓은 모든 것에 대한 의지를 절대로 굽히는 법이 없었다.

성인이 된 상담자는 무언가를 책임지고 맡아서 해나갈 의욕도, 능력도 없어보였다. 늘 세세한 부분까지 명령이나 요청의 형태로 전달을 받아야만 겨우 따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건 사실 진짜 자신의 의견이나 원하는 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적응일 뿐이었다. 부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할 때마다 그것이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지는 상황을 겪어왔기 때문에 택한 최소한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분명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성인으로 성장하려면 자신의 뜻이나 바람이 사회관계 내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자기보다 어른들, 자기보다 앞선 세대, 이를테면 부모·교사·교수·직장상사·선배 등이 선택하고 결정한 것들로 이미 탄탄히 구성된 세상에서 가끔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네 생각을 말해봐”, “네가 바라는 것을 해봐”.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이 전적으로 내 것이기만 한 생각이나 바람을 요청하는 것이 아님을. 그 뒤에 숨겨진 뜻은 “네 생각, 네 바람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되게 해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말한 “음료수 사와. 네가 알아서”의 두 번째 의미가 된다. 이 말이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음료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요청이 되려면 적어도 이런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음료수를 네가 직접 골라봐.”

어른이 된다는 것

카페라테를 좋아하는 어른이 혹시 더 좋은 것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심부름을 시키고, 밀크티를 골라온 아이에게 어떻게 이걸 사왔느냐고 묻고, 그것이 적절해 보인다면 밀크티도 마실 만하다고 웃어줄 수 있어야 한다. 카페라테 마시기만을 고집하면서 “알아서 사와”라고 말하는 어른 앞에서라면 아이는 성인이 되는 과정을 제대로 겪기 어렵다. 그것은 자기 뜻을 펼칠 기회가 아니라 순종에 대한 시험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신분석가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욕망’, 쉽게 말해 ‘개인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제대로 실행하며 살아가기’는 이렇게 자신의 답으로 모든 것을 채우는 어른의 세상이 아니라 종종 자신의 답 대신 다른 답을 찾고 승인해주는 어른의 세상에서 가능한 것이 된다.

<이수련 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