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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비핵화는 북·미가 하도록 놔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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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대역은 없다.”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두고 청와대는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는 오는 4월 27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두 차례 리허설을 가질 예정이다. 한때 대역을 세워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이 그렇다. 당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73)은 김용순 북한 대남담당비서 역할을 맡았다.

[특집]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비핵화는 북·미가 하도록 놔둬야”

정 전 장관은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차관과 장관을 역임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초대 통일부 장관을 맡았다. 최근 정세를 두고 정 전 장관은 “예상보다 상황이 빨리 흘러가고 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전 두 대통령과 스타일은 다르지만 잘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 전 장관은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하려고 해선 안 된다.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구체적인 것들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18일 진행됐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부터 이번 정상회담까지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세 정상회담의 특징을 정리한다면?

“2000년 정상회담의 시작은 북한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북·미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거기에는 ‘페리 프로세스’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2007년 정상회담은 미국의 필요로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강경 일변도로 나가다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전략을 바꾼다. 당시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식적인 종전’을 언급했고 이 흐름이 정상회담까지 이어졌다. 즉 미국이 북한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한국을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소중한 기회이지. 이번에는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 먼저 다리를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압박을 해서 북한이 나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남북관계를 다시 풀어나가자’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에서 시작된 거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말에 동조하도록 분위기를 잘 만들어갔다. 드디어 한국 정부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동안 남북대화를 북·미대화로 가는 ‘다리’라고 강조했다. 이번 정상회담도 마찬가지인가.

“청와대에서 ‘길잡이 회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비핵화와 관련해 북한을 확실히 설득해서 북·미 정상회담으로 넘겨준다는 의미라고 본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비핵화의 길로 가기 위한 방법론이나 비핵화의 시간 등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 이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가 진행돼야 한다고 보나.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그걸 문자화하는 게 가장 좋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는 어렵다. 북·미 정상 간에 이야기할 것을 남겨둬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이라는 말 정도만 나와도 괜찮다. 평화정착이라는 말은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비핵화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시간 등은 북·미가 하도록 놔둬야 한다. 한국 정부는 평화체제 구축에서 4분의 1의 역할만 하는 모양새가 돼야 한다. 나머지는 북한, 미국, 중국의 몫이다.”

-문 대통령의 자문그룹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문 대통령을 만나 각자 돌아가며 의견을 말하는 게 전부다. 21명의 조언을 모두 모아놓으면 도움이 되겠지. 나는 남북관계 특성상 국민들의 이념적 편차가 크기 때문에 정상회담 자체도 중요하지만 홍보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미 정상회담 같은 경우 회담 후에 결과만 알려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지만 남북정상회담은 다르다. 미국에 대한 정서와 북한에 대한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 두 대통령은 ‘모의회담’이나 ‘집중 과외’ 등으로 상당히 준비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모의회담은 2000년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청와대에서 열렸다. 실제 현장에서 대응능력이나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내가 김용순 당시 북한의 대남담당비서 역할을 맡았고 김달술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할을 했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김달술씨를 ‘위원장 동지’이라고 불렀고 ‘장군님’이라는 단어도 썼다. 김정일 위원장은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괴롭히는 발언들은 주로 내가 했다. 주한미군이나 국가보안법 등의 이슈를 꺼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공격했는데 답변이 술술 나오더라. 참 공부가 많이 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 역할을 맡은 김달술씨의 평가는 어땠나.

“김달술씨는 1961년도에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박정희 정부에서 국장급까지 지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쪽에 핵심인물인 셈이다. 애초 2시간으로 예상했던 모의회담은 4시간 동안 이어졌다. 회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김달술씨가 ‘김정일에게 안 당하겠다.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만큼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세 번째 정상회담인데 문 대통령은 이전 두 대통령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이전 두 대통령은 정치적인 연설에 아주 능했고 대중 설득력도 뛰어났다. 두 대통령에 비하면 문 대통령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오히려 회담 테이블에서 경쟁력이 있다. 변호사 출신답게 쉬우면서도 논리적으로 조근조근 상대를 잘 설득한다. 김정은 위원장과 대화가 잘될 것이라고 본다.”

-문 대통령의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문 대통령을 지켜본 결과, 참모들의 조언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다만 지금 한국 정부가 운전자석에 앉아 있으니까 우리가 합의문 초안을 가지고 가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리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상회담 자리에서 ‘이거는 좀 보완하자’ ‘이거는 못 받겠다’ 등 실질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어떻게 나올 것이라고 보나.

“김정일 위원장의 경우, 2000년 정상회담 경험이 2007년 정상회담 준비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과 우리 대통령이 마주앉은 적이 없기 때문에 성격이나 화법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우리 정부의 특사나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대한 것을 봤을 때, 이번 기회에 북·미관계를 개선하고 비핵화도 화끈하게 결정하고 북한의 정치·경제적 여건을 만들려는 의지는 확실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남북정상회담은 물론이고 북·미 정상회담도 원활하게 될 것이라 본다.”

-‘화끈한 비핵화’가 가능할까.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준다고 약속하면 비핵화는 쉽다. 군사적으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국제법으로 보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평화협정과 동시에 정치수교를 해서 평양에 미국대사관이 들어가고 워싱턴에 북한대사관을 들인다고 생각해봐라. 따라서 비핵화의 속도는 미국이 군사대결 종식을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해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번 북·미 정상회담이 중요하고 그 길잡이 역할을 할 남북정상회담이 중요하다.”

<글·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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