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성에 대한 혐오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도를 넘어선 여혐·남혐 발언들… 관용의 정도 낮은 한국사회 특수성인가

“생수통 왜 안 옮겼어?” 대학원생 김민호씨(30·가명)의 연구실에서 올해 초 ‘생수통 논란’이 벌어졌다. 시작은 여느 직장이나 사무실에서 있는 흔한 실랑이와 비슷했다. 여성 구성원들이 짐이나 물건을 옮기는 일을 꺼린다고 보는 남성 구성원들의 불만이 입 밖으로 나오면 논쟁은 시작된다. 한겨울 연구실 문 밖에 배달된 19ℓ짜리 생수통을 안으로 들여놓지 않은 채 주말을 보내 물통이 얼어 터졌고, 곧 그 책임 시비가 불거졌다. 당시 연구실에 남아 있다 문을 나선 여자 대학원생들은 들어서 옮길 힘이 없어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남녀 간에 날선 공방이 시작됐다.

김씨와 동료들은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있다. 페미니즘(여성주의)이나 성별 격차 등의 문제를 적잖이 알고 있는 ‘배운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라 온갖 학술적 용어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내려야 할 결론은 간단했다. “‘생수통은 남자가 나른다’처럼 연구실 내 일거리를 어떤 방식으로 나눌지가 문제였죠. 근데 남자들한테는 여자들에게 피해의식 없는 대범한 남자로 보이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이더라고요. 여자들도 지지 않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식이고….” 김씨는 결국 한 달 가까이를 끌던 지지부진한 다툼이 남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드는 결과만 남긴 채 끝나 버렸다고 말했다.

2011년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성폭력 저항 슬럿워크 시위 참가자가 여성 비하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성폭력 저항 슬럿워크 시위 참가자가 여성 비하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생수통을 누가 들 것인가” 대표적 분란
‘생수통 논란’은 현실만큼이나 인터넷 상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성 간 분란 주제의 대표적인 예다. “여자들은 혼자서 생수통 교체 못하나요?” 같은 식의 게시글이 올라오면 그에 호응하며 자신의 경험을 댓글로 올리는 남성 이용자들이 줄을 선다. “여자가 들기엔 너무 무겁다”거나 “나도 여자지만 그거 무겁다고 약한 척하는 사람들 볼썽사납다”는 식의 여성 이용자 답변도 올라온다. 문제는 상황마다 적당히 해결하고 넘어갈 법한 남녀 사이의 문제들에도 이성을 비방하는 ‘혐오 발언’을 일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욕설 및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통의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지이지만 ‘디시인사이드’(디시)에서는 이례적이다. 이용자들 사이의 반말과 욕설이 흔한 게시판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디시에서조차 게시판 상단에 별도의 공지를 올릴 정도로 신생 게시판 ‘메르스 갤러리’(멜갤)의 혐오 발언이 도를 넘어선 것이다.

메르스가 국내에 유입된 후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만들어진 ‘멜갤’에서 메르스와는 무관하게 남녀가 서로를 헐뜯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메르스 보균자와 접촉한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들이 해외에서의 격리조치에 항의했다는 보도에 여성 전체를 비난하는 ‘여성 혐오’(여혐)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해당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여혐 게시물에서 흔히 쓰이는 어투와 논리를 그대로 빌린 ‘남혐’ 게시물이 속속 올라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 혐오로 유명한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혐오 문법을 그대로 빌려 ‘여성 혐오를 혐오’하기 위해 반어적 내용의 글을 올리는 한 무리의 세력까지 생겨났다.

졸지에 ‘멜갤’이 혐오 발언의 온상이 된 계기는 우발적이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일베의 경계를 넘어 확산되던 여혐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 대규모 여성 전용 카페인 ‘여성시대’ 회원들이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자신들이 소속된 ‘여성시대’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게시판 조작을 일삼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해당 카페와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급속도로 퍼졌다. 여혐의 대상이 여성시대 일부 회원을 넘어 여성 전체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그에 맞서는 남혐 여론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운전 못하는 ‘김여사’와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된장녀’에 이어 여성은 무책임한 대응을 일삼는다는 어조가 담긴 ‘아몰랑’의 유행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열세에 몰려 있던 여성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남녀 서로에 대한 혐오적 지칭은 ‘김치남’과 ‘김치녀’를 기본으로, 여기에 욕설을 가미한 어휘들이다. 한국인을 가리키는 김치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도 보듯 흔히 표현하는 ‘여성 혐오’나 ‘남성 혐오’라는 표현 대신 ‘자국 이성 혐오’로 한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여성이나 남성 전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자국인 한국의 남녀만을 혐오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국의 이성 상대를 두고는 성적인 매력이 부족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차별(역차별)을 옹호한다고 비난하지만, 외국의 이성은 그런 단점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맹목적으로 추앙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김치녀’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해야 할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여성에게 주어진 권리와 혜택만 챙기는 존재이고, ‘김치남’은 가부장적이며 기존의 남성 기득권을 잃게 될 상황이 되면 눈에 불을 켜고 나서는 존재가 된다.

청년층에서 이성교제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 지속될수록 자국 이성 혐오현상이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2년 12월 24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남녀 단체 미팅 행사 '솔로대첩'은 몰려든 참석자들이 대부분 남성뿐이어서 중단됐다. / 서성일 기자

청년층에서 이성교제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 지속될수록 자국 이성 혐오현상이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2년 12월 24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남녀 단체 미팅 행사 '솔로대첩'은 몰려든 참석자들이 대부분 남성뿐이어서 중단됐다. / 서성일 기자

상대적 열세에 있던 여성들의 반격
자국 이성 혐오 발언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성이 이성의 차별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의식이다. 자신이 연애를 못하는 것은 상대편 이성이 너무 문란하거나 돈과 외모만 밝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관련 연구자들은 특히 청년층이 실업이나 대출 등의 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애와 같은 이성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되는 현상이 이성 혐오의 주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는 싶지만 그것을 이루기가 어려워지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이성에게 보이는 단점의 일면을 확대해 혐오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의 연구 결과에서도 청년층에서 이성교제에 대한 희망과 현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조성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의 ‘최근 미혼 인구의 특성과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미혼남녀 중 이성교제를 희망한다는 비율은 남 64.9%, 여 56.5%로 나타났지만 실제 이성교제를 하고 있다는 비율은 남 33.8%, 여 35.6%에 불과해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컸다. 특히 경제사정이 어려울수록 격차는 더욱 커져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남녀의 이성교제 비율은 경제활동을 하는 남녀에 비해 남녀 각각 11.3%포인트, 10.6%포인트 낮았다. 조 위원은 “현재 이성교제를 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 미혼남녀들의 교제희망 비율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방해하는 것은 남녀 모두 경제적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실제로 이성교제의 경향을 보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의 이성교제 비율이 큰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곤란으로 연애 기회 상실도 원인
자국 이성 혐오가 청년층의 경제적 어려움과 그에 따른 연애 기회 상실 때문이라는 점은 남성과 여성에게서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특히 남성의 경우 20·30대 남성인구에 비해 여성인구가 크게 모자라는 성비 불균형을 겪는 등 인구학적 요인까지 더해진다. 29~35세의 결혼 연령대 남성인구는 24~30세의 여성인구보다 42만4000여명이나 많다. 해당 연령대 남성 가운데 15.2%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남아선호에 따른 선택 출산으로 성비가 110 이상을 유지해온 시기에 태어난 13~29세 남성은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성을 우대하는 가정과 사회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반면 청년층 여성의 경우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화됐지만 아직도 사회·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주요 국가 가운데 성별 격차 수준이 가장 높은 한국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은 2012년 기준 남녀 임금 격차가 37.4%나 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 100일 때, 여성 노동자 임금은 62.6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남녀 임금 격차의 개선 속도도 한국이 가장 느리다는 점 역시 기득권을 가진 남성을 혐오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OECD 평균 임금 격차가 12년 동안 4.4%포인트가 줄어드는 사이에 한국에선 2.9%포인트만 줄어 OECD 평균과 격차가 더 벌어졌다.

자국 이성에 혐오감정을 느끼는 현상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권을 비롯해 유럽과 북미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반여성주의 시각과 함께 자국 여성을 평가절하하는 남성들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여성주의가 사회의 공론장에서 논의된 역사가 오래된 서구에 비해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관용의 정도가 낮은 한국 사회이기 때문에 남녀간의 차이를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혐오발언까지 쉽게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극심한 이성 혐오는 사회통합을 해쳐 장기적으로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지출할 수도 있다.

박명호 한국외대 교수(경제학)가 OECD 회원국들의 사회지표를 비교분석해 내놓은 ‘지표를 활용한 한국의 경제사회발전 연구’ 논문에서도 한국의 관용지수는 31위로 전체 조사대상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박 교수는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최하위로 나옴에 따라 사회통합지수도 24위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며 “배려와 관용이 확대되는 사회로의 전환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반해, 이러한 사회통합의 역량을 키우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국가 간 불평등 확대는 앞으로의 성장잠재력과 사회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