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부 기록 빨리 없애는 게 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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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관리 폐기규정 완화 추진… 60여개 정부기관서도 반대 의견

최근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평범한 시민인 김종익씨를 사찰했다는 것이 폭로되면서 온 나라가 소란스럽다. 말 그대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직자들의 비위 사실을 감찰해야 하는 곳임에도 직무 범위를 넘어 일반 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사찰했다는 것이 온 국민을 충격에 빠지게 한 것이다.

정부는 최근 기록물관리법을 개정해 보존기간 1년에서 3년 이하 기록물 평가 및 폐기 시 기록물평가심의회의 심의를 생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대전 정부청사에 위치한 국가기록전시관. |연합뉴스

정부는 최근 기록물관리법을 개정해 보존기간 1년에서 3년 이하 기록물 평가 및 폐기 시 기록물평가심의회의 심의를 생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대전 정부청사에 위치한 국가기록전시관. |연합뉴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전혀 다른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경찰서에 김씨에 대한 수사 의뢰를 공문(기록)으로 발송해 정식 요구했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동안 불법 행위를 의도적으로 기록에 남기는 간 큰 공무원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경찰서에 공문을 발송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불법 행위도 인지 하지 못할 정도로 윤리의식이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작은 윤리 의식이라도 남아 있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사찰했다면 김씨는 그 억울함을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이 유야무야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공무원들이 직무를 행한 결과를 남기는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십 년 뒤에도 해당 정권을 평가할 수 있는 기반이자 유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정부는 매우 충격적인 시행령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하 기록물관리법)을 개정해 ‘보존기간 1년에서 3년 이하 기록물 평가 및 폐기시 기록물평가심의회의 심의를 생략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기록물은 대부분 보존기간 1년에서 3년 이하 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기록물평가심의위 심의 생략 추진
현행 법안에서는 모든 기록을 생산해 폐기할 때에는 보존기간 1년부터 30년까지 해당하는 모든 기록에 대해 외부 심사관이 참가하는 기록물평가심의회를 개최해 평가받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존기간 3년짜리 기록을 3년이 지났다고 해서 무조건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물평가심의회를 거쳐 다시 한 번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그동안 이런 제도를 둔 이유는 기록물 보존 기간은 생산할 때 기준이지 폐기 시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산할 때는 중요 기록이 아니지만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해 폐기 시에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변할 수도 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아무 생각 없이 경찰서로 보낸 공문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기록물평가심의회에서는 보통 폐기 대상 기록 가운데 약 10%의 기록에 대해 보존기간을 연장하고 있다.

기록물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는 지방자치단체 사무 감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기록관리 분야를 살펴보면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물 보존기간 미설정’ ‘기록물 보존기간 하향 설정’이라고 지적하고 시정이 요구된다는 감사 결과를 내놓고 있다.

기록을 오래 남기면 귀찮은 일만 발생한다는 인식이 아직까지 공공기관에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존기간을 5년 이상 으로 설정해야 하는 기록을 1~3년으로 하향 조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현실에서 법안 개정을 한다면 보존기간을 하향 조정하는 일은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며, 그 기록들은 어떤 평가도 없이 폐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결과 중요한 문제가 터질 때 기록에 의한 사무 감사 및 검찰 수사도 불가능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도대체 이 정부는 무엇이 두려워서 기록을 이처럼 쉽게 폐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 개정법안에서는 ‘학력 제한 철폐’라는 미명 아래 기록관리 전문요원의 자격을 완화하려고 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에서 사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록관리 전문요원은 ‘기록관리학을 전공한 석사 학위 이상 학력자’에서 ‘기록관리학, 역사학, 문헌정보학, 보존과학을 전공한 학사 학위 이상 학력자 가운데 1년 이상 기록관리 경력이 있고, 1년 이상 교육을 받은 자’면 기록 전문요원으로 임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항을 잘 보면 학력 제한 철폐가 아니라 현직 공무원들의 자리를 넓히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기록관리전문요원 자격 완화도

국가기록원에서 직원들이 기록물을 정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국가기록원에서 직원들이 기록물을 정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공공기관에서는 기록관리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공공기관에 정보공개 청구를 하면 기록이 없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고, 심지어 기록을 잃거나 의도적으로 없애는 일도 흔했다.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니면서 기록전문요원제도를 집중적으로 양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법안 개정에는 기록 전문요원들의 전문성을 무시한 채 그저 다루기 쉬운 공무원을 기록 전문요원으로 채용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또한 이번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어렵게 지난 10년 동안 발전시킨 기록관리학 학문은 무너질 것이며, 대부분의 기록관리대학원은 문을 닫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기록물을 쉽게 폐기할 수 있는 것과 공무원 출신 기록 전문요원을 채용하겠다는 법안 개정안이 이번 정부의 의도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이번 시행령 개정안은 정부기관 의견 조회에서 60여 개 기관이 반대의견을 냈다고 한다. 시행령 개정안에 이처럼 많은 반대의견을 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기록관리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기록관리위원회가 이번 사안에 대해 지난 3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시켰음에도 심의 및 의결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는 전혀 목소리를 듣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자리만 존재하는 ‘허깨비 위원회’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한 기록 전문요원은 “기록관리정책을 총괄하는 행정안전부는 기록관리체계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일하고 있고, 오히려 각급 기관에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록관리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매우 참담하고 역설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7월 현재 이명박 정부는 온갖 문제가 터지고 있다. 정권의 가장 기본인 기록관리정책을 보면 이런 결과는 당연해 보인다. 기록관리정책은 민주주의 기본 중의 기본이자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주춧돌이다. 정부가 이번 시행령을 밀어붙인다면 민심은 더욱 요동칠 것이며, 이 정권은 점점 더 수렁 속에 빠져들 것이다. 국민은 이명박 정부를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전진한<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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