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준 우리 히어로즈 단장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프로야구 연봉 거품 걷어내야 합니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박노준  우리 히어로즈 단장

2008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개막했다. 기아 타이거스·두산 베어스·롯데 자이언츠·삼성 라이온스·한화 이글스·우리 히어로즈·LG 트윈스·SK 와이번스 등 8개 구단이 우승기를 놓고 싸우고 있다. 이 중 신생구단인 우리 히어로즈는 최근 몇 개월간 가장 주목을 끈 팀이다. 팀 창단 및 연봉협상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창단 주역인 박노준(46) 단장이 있었다. 선린상고 재학 시절인 1979년부터 1981년까지 고교야구 최고의 스타로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주인공이다. 그간의 속사정과 향후 계획을 듣기 위해 우리 히어로즈의 홈구장인 목동구장을 찾았다.

지난 3월 31일 우리 히어로즈 홈구장인 서울 목동구장. 서울시가 최근 53억 원을 들여 천연잔디를 인조잔디로 바꾸는 등 개보수 공사에 들어갔지만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아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다. 실내는 벽 뚫는 드릴소리와 함께 사무공간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고, 잔디가 깔린 경기장 여기저기에도 공사 자재들이 쌓여 있다. 경기장 1층 투명한 유리문에 ‘우리 히어로즈’라고 씌어 있는 사무실 역시 이제 겨우 모양새를 갖추느라 아직은 휑뎅그렁하다. 책상마다 전화기만 달랑 올려져 있을 뿐 흔한 책장이나 서류 더미도 없다. 박노준 단장의 집무실은 사무실 안쪽에 있다. 박 단장은 새 집에 이사 온 사람이 그렇듯, 풀어놓아야 할 짐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180㎝의 훤칠한 키에 오뚝한 콧날이 인상적인 박 단장. 그에게 지난 몇 달 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제8구단 창단작업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다. 공중분해될 처지에 놓였던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해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는 작업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농협, STX, KT가 잇따라 인수를 포기하고 다른 기업들도 적자가 뻔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프로야구단 운영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기로 했지만 이때부터 더 큰 폭풍이 휘몰아쳤다. 1월 30일 KBO와 창단 조인식을 한 센테니얼이 ‘창단’을 강조하며 김시진 감독 교체, 코칭 스태프 경질, 선수단 및 프런트 축소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예고하면서 선수단과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감독과 코칭 스태프, 프런트, 선수단 전원 고용 승계를 주장하며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제8구단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선수단에 한해 전원 고용 승계하는 선에서 갈등은 어느 정도 봉합되는 듯했다.

하지만 연봉협상 과정에서 또다시 잡음에 시달렸다. 국내 프로야구 사상 가장 큰 폭의 연봉 삭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 및 신인 선수 다섯 명을 제외한 연봉 총액은 26억6900만 원으로 지난해 연봉 41억2970만 원에서 35.4%나 줄었다. 이 같은 대폭적인 연봉 삭감에 선수는 물론 언론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박 단장은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른 오만한 군주’라도 된 양, 선수단과 언론, 네티즌으로부터 연일 두들겨맞으며 철저히 소외됐다. 그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할 말은 해야겠다”며 작심한 듯 그간의 속사정을 토로했다.

“언론에서 우리가 돈이 없어 선수들 연봉을 후려쳤다고 보도했는데,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 연봉에는 거품이 너무 많이 끼어 있던 게 사실이에요. 한 선수가 4년간 60억 원을 받아가는 건 안 돼요(2005년 시즌 삼성 심정수 선수의 기록을 말함). 이런 고액 연봉 선수들의 거품을 걷어내야 해요. 우리 실정에 적합한 최고 연봉은 3억~4억 원 수준이에요. 반면 중간급은 8000만~1억 원 정도로 올리고, 최저 연봉도 지금의 2000만 원에서 좀더 끌어올려야 해요. 우리 프로야구 역사가 27년인데 미국이나 일본도 27년차에 이렇게 많은 연봉을 주지 않았어요. 우리의 3분의 1 수준이었어요.”

우리 히어로즈의 포수 김동수가 지난해 연봉 3억 원에서 73.3% 삭감된 8000만 원에 재계약한 것을 비롯해 전준호(72% 삭감, 2억5000만 원→7000만 원), 이숭용(51.4% 삭감, 3억5000만 원→1억7000만 원), 송지만(63.3% 삭감, 6억 원→2억2000만 원) 등 주전급 선수들의 연봉이 대폭 삭감됐다. 연봉협상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정민태 선수는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을 거부하고 자유계약선수(FA)가 된 후 기아로 이적했다.

연봉 협상과 관련해 박 단장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는 “선수들이 자기들 유리한 것만 언론에 이야기해 나만 죽일 놈 됐다”고 주장했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박노준  우리 히어로즈 단장

“실질적인 연봉 삭감은 최대 6억 원에서 최소 2억5000만 원까지 받는 고액 연봉 선수들 간에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냉정하게 평가하면 이들은 활약도나 나이를 따졌을 때 새로 창단하는 우리 히어로즈에는 필요 없는 선수들이에요. 정민태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이들을 버리면 갈 데가 없어요. 선배로서 기회를 주는 차원에서 계약한 거예요. 김동수와 전준호는 기록이 걸려 있어요. 김동수는 2000경기 출장에 84경기를 남겨놓고 있었거든요. 한·미·일 통틀어 포수가 2000경기 출장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대단히 큰 업적이에요. 전준호 선수도 삼성 양준혁 선수에 이어 2000안타가 99개 남아 있고, 2000경기 출장 기록도 44경기만 남았어요. 이 친구들은 100만 원만 받더라도 대기록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뛰어야 하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전준호 선수는 대외적으로는 7000만 원에 연봉 계약을 한 것으로 공표했습니다만 연봉 외에 따로 일시불로 2000만 원을 지불했고, 44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면 2000만 원을 보너스로 주기로 했어요. 김동수 선수도 마찬가지예요. 연봉계약 외에 84경기 출장하면 3000만 원을 주기로 했어요. 거저 따먹을 수 있는 돈이에요. 솔직히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주는 대로 받고 뛰어도 황송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할 말 다 했기 때문에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섭섭해요.”

그는 또 “정민태도 연봉 8000만 원을 제시했지만 여기에 5000만 원 정도를 그냥 따먹을 수 있도록 옵션을 걸어놨다”면서 “그가 돈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팀을 나가 기아와 7000만 원에 연봉계약을 했다고 발표했지만 그 돈을 받고 이적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박 단장에 따르면 본 계약서와 KBO에 제출하는 계약서는 항상 금액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히어로즈의 전신인 현대 유니콘스에는 이런저런 청탁으로 받아들인 선수를 포함해 불필요한 선수가 13명이나 있었다. 선수 한 명에게 1년간 들어가는 운영비는 3816만4000원. 가령 2000만 원에 연봉계약을 한 선수라고 하면 그 선수에게 1년간 들어가는 돈이 5816만4000원이라는 얘기다. 박 단장은 “선수들 스스로 100% 고용 승계할 경우 고통 분담을 하겠다고 했고, 이들 13명을 정리하지 않는 조건으로 연봉을 삭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한 한 가지. 박 단장이 받는 연봉은 얼마나 될까. 그는 “내가 8000만 원, 이광환 감독이 1억 원”이라고 말했다. 다만 박 단장의 경우 광고주 등 비즈니스를 위해 대외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법인카드는 있다고 한다.

그는 “올가을 우리 히어로즈를 제외한 다른 구단에서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예고했다. 전체 30% 구조조정이 들어가기 때문이란다. 그는 “우리 히어로즈가 연봉 협상을 하기 전 이미 모든 구단에서 합의한 구조조정안인데도 다른 단장과 선수들이 이를 나에게 덮어씌우려 했다”고 주장했다.

“2월 14일 단장회의가 열렸어요. 당시 우리 히어로즈는 구단주총회에서도 통과가 안 된 시점이라 회원 자격이 없었어요. 저는 이날 단장회의에 센테니얼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옵저버로 참석했어요. 발언 자격도 없었고요. 현대 단장을 포함해 8개 구단 단장은 연봉 삭감 하한선을 폐지하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였어요. 또 2009년 정규 시즌부터 선수단 연봉 총액의 30%를 삭감하고, 2010년엔 20%, 2011년엔 10% 삭감한다는 계획도 세워놨어요. 2009년 연봉 계약은 올 시즌 끝나면 하니까 피바람이 불겠죠. 그런데 우리 히어로즈가 먼저 연봉 삭감을 하니까 마치 우리 때문에 다른 구단도 구조조정을 하는 것처럼 저한테 덤터기를 씌우려 했어요. 제가 기자회견에서 진실을 공개하자 선수협회에서 제게 사과했어요. 우리 히어로즈 선수들은 매를 조금 먼저 맞은 것뿐이에요.”

이 외에도 이날 합의된 것이 있다. 자유계약선수(FA)의 몸값 거품을 없애기 위해 FA 계약을 철저히 규약대로 하고, 다년계약도 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FA 제도는 9시즌 이상 열심히 뛴 선수가 소속 구단과 재계약이 결렬되면 다른 구단과 교섭할 수 있는 제도다. ‘야구규약 제165조’에 따르면 FA 계약금은 없고 몸값은 전년도 연봉의 50%를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구단들은 그동안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FA 몸값을 키워왔다. 계약금과 다년계약으로 엄청난 돈을 썼다. 2005년 삼성과 계약, 최대 60억 원의 대박을 터뜨린 심정수의 경우만 해도 계약기간 4년에 계약금 20억 원, 연봉 7억5000만 원을 받았으며 플러스 마이너스 옵션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는 불법이다. 규약대로라면 계약금 20억 원은 없어야 하고 계약도 1년 단위로 해야 한다. 이 조건으로 계약한다면 4년간 최대 36억 원을 받아야 맞다.

일찍이 투수와 타자로 스타성을 인정받은 박노준의 고려대(오른쪽) 시절과 OB와 해태 선수로 뛰던 시절. <경향신문>

일찍이 투수와 타자로 스타성을 인정받은 박노준의 고려대(오른쪽) 시절과 OB와 해태 선수로 뛰던 시절. <경향신문>

박 단장은 자신이 우리 히어로즈의 단장이 된 것은 “야구판이 깨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연봉 협상과정에서 너무 치이고 힘들어서 이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고 말했다.

“현대 유니콘스가 공중분해돼 프로야구가 7개 구단이 되면 한 팀은 나흘을 놀아야 해요. 현재 8개 구단이기 때문에 하루 4경기 아귀가 맞는 거예요. 7개 구단이 되면 판이 작아지기 때문에 중계권 100억 수익은 어림없고, 30억 원도 힘들어요. 또 입장 관객 400만, 500만은 꿈도 못 꿔요. 전 야구하면서 이만큼 컸기 때문에 프로야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어요. 여러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해달라고 낚싯밥을 던져놓았죠. 그런데 없었어요. 매년 200억 원을 퍼부어야 하는데 누가 하겠어요? 그런데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 회장이 ‘200억 원 창단자금은 대는데, 1년 평균 150억 원씩 들어가는 운영자금을 댈 돈은 없다. 해법이 있느냐’며 절 부르셨어요. 전 네이밍 마케팅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답했고, 그래서 창단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정도 창단 준비가 된 후 연봉협상 과정에서 제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께서 그럼 당신도 안 하시겠다고 해요. 그래서 다시 마음 다잡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우리 히어로즈는 박 단장 말대로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네이밍 마케팅을 통해 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팀 이름을 메인 후원 기업(우리담배)에 3년간 100억 원씩 받기로 하고 판매한 것을 비롯해 헬맷, 유니폼 상의 전면, 소매 등에도 후원 기업의 이름이 붙는 방식이다. 우리 히어로즈의 행보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성공을 자신하는 박 단장은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는 이 같은 운영방식이 성공을 거두면 제9, 제10구단이 더 빨리 탄생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프로야구 정기 시즌이 이미 개막했지만 박 단장은 “이번 시즌에서는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꼴찌만 아니어도 대성공’이라는 게 우리 히어로즈에 대한 그의 솔직한 평가다. 시범경기를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2월 중순에야 본격적으로 훈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올해와 내년은 팀을 리모델링하는 기간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와서 보니 부상자도 많고 노장도 많아요. 세대 교체를 포함한 리모델링이 필요해요. 특히 포수 부분이 굉장히 취약하고, 센터라인도 약하더라고요. 2년 정도는 고생해야겠다 싶어요. 메이저리그식 야구는 단장야구인데 제가 그동안은 창단 준비하느라 바빠 전력에 전혀 손을 대지 못했어요. 감독의 고유 권한인 선수 기용이나 작전권을 제외하고 앞으로 투수 세팅이나 1번부터 9번 선수 라인업 등은 제가 할 거예요. 미국 프로야구 피츠버그에서 방출돼 자유계약선수가 된 김병현이나, 외국인 선수들도 영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이를 위한 자금은 구단주가 주시겠답니다.”

그런 그가 꿈꾸는 프로야구는 온 가족이 구장을 찾아 먹고 즐기면서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수 있는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다. 그는 “목동구장이 서남부 지역민들의 꿈의 구장이 될 수 있도록 먹을거리와 놀거리를 다채롭게 준비하는 등 다각도의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고교야구 오빠부대 몰고 다닌 박노준

박노준 단장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직전까지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고교야구의 절정기를 이끈 주인공이다. 1979년 4월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그가 다닌 선린상고는 부산상고를 15 대 1로 격파했고, 입학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박노준은 MVP를 수상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2학년 때인 1980년에는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었다.

투수서로도, 타자로서도 일찍이 스타성을 인정받은 그는 1979~1981년 고교야구 최고의 영웅으로, 같은 학교 선수인 김건우와 함께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선린상고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수도여고, 상명여고, 서울여고 등 여고생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교문 앞에 진을 쳤다.

1981년 8월 26일 봉황대기 결승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발목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깁스를 한 채 병원에 입원한 박노준. <경향신문>

1981년 8월 26일 봉황대기 결승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발목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깁스를 한 채 병원에 입원한 박노준. <경향신문>

그가 꼽는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은 1980년 10월 5일 선동렬이 이끌던 광주일고와의 황금사자기 결승전이다. 4회말 2사후 안타로 진루해 1 대 1 동점을 만들고, 5회에 마운드에 올라 2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더니, 6회에 선동렬의 4구를 통타해 2 대 2를 만들었다. 그리고 3 대 2로 앞선 8회말 2사 1루에서 타석에 나와 선동렬의 볼을 받아 커다란 홈런을 날린 것이다. 결과는 5 대 3으로 선린상고의 승리.

하지만 이듬해 8월 경북고와 맞붙은 봉황대기 결승전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줬다. 박노준은 가장 안 좋았던 기억으로 이때를 꼽는다. 이 대회는 대중들의 뇌리에도 박노준을 ‘비운의 스타’로 각인시켰다. 1회말 2사 만루에서 김경재가 좌전 안타를 치자, 안타를 치고 나갔던 박노준을 포함한 두 명의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고 홈 악송구까지 겹치면서 일순간에 3점이 난 순간이다. 그러나 2루 주자로 홈을 향해 슬라이딩을 시도하던 박노준은 왼발이 꼬이면서 발목뼈가 세 동강 나고 인대가 끊어졌다. 그 상황에서도 간신히 기어서 점수를 올렸지만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 나갔다. 이 일로 철심을 박은 채 3개월간 깁스를 해야 했고, 6개월간 야구를 하지 못했다. 선린상고는 1981년 봉황대기의 우승기를 경북고에 넘겨야 했다.

고교 졸업 후 1982년 고려대에 입학한 박노준은 선수생활을 병행하며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OB에 입단했지만 잦은 부상으로 고교시절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만 있다가 벤치에 앉아있는 날이 많았던 그때 인생 공부를 많이 했다”면서 “선수생활이 끝나면 미국에 유학을 가리라고 마음먹고 1992년부터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1997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은퇴한 후 그는 계획한 대로 2년 간 미국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세인트 카타린과 뉴욕 메츠 마이너리그팀에서 코치 공부를 했다. 이후 SBS 야구해설위원으로 활약했고 이제 우리 히어로즈의 단장으로 활약하는 것이다.

●약력
봉천초등-선린중-선린상고-고려대 졸업
프로 경력 OB베어스(1986~92년)-해태 타이거즈(1992년)-쌍방울 레이더스(1993~1997년)

1998년 미국 토론토 블루제이스 순회 코치

1999년 뉴욕 메츠 순회 코치

2000년 아시아야구연맹 순회 코치-경인방송 해설위원

2001년~2007년 SBS 야구해설위원

2006년 국제야구연맹(IBAF) 기술위원

2008년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

아주 특별한 인터뷰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