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박근혜 사과’에 없는 것 진정성·핵심 그리고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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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데 박 대통령은 말이 없다. 침묵이 문제를 키운다는 비판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그는 왜 국민과의 소통인 사과에 이토록 인색한 것일까.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이 10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국정감사에서 국정원의 트위터 활동, 검찰의 국정원 수사 방해 논란 등이 추가로 폭로되면서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말이 없다. 

정권의 정통성이 의심받는 국면인데도 대국민 사과나 유감 표명,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국민은 물론 정치권에서조차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 및 유감을 표명하거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는 게 통상의 방식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대통령 사과의 의미는 엄밀하게 정립될 필요가 있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국정 총책임자로서 대통령이 진심을 담아 국민 앞에 설득과 양해를 구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10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노인회 등 노인단체 관계자를 초청해 마련한 오찬에서 기초연금 공약 수정에 대해 사과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10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노인회 등 노인단체 관계자를 초청해 마련한 오찬에서 기초연금 공약 수정에 대해 사과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전직 대통령들 고비 때마다 ‘사과’
대국민 사과를 비롯해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발표하는 대통령의 담화문 및 기자회견문 등은 대통령에게 불리한 정쟁을 종료하고, 위기국면을 타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009년 1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사과를 한 후 지지율이 넉 달 연속 상승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시아연구원 보고서는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되고 이후 논의의 중심이 정치권과 국회로 넘어감에 따라 세종시 책임론의 충격을 완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분석했다. 대통령 국정 지지에 세종시 이슈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계기가 된 시점이 원안 수정에 대한 사과 이후였다. 대통령의 사과가 대통령에게 불리한 국면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대통령의 사과가 문제가 발생한 이슈에 대해 매듭을 짓는 정치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사무국장은 “대통령의 사과가 지지율을 올리는 직접적 요인이라고는 확언할 수 없지만, 문제가 발생한 해당 이슈에 대해 마감을 하는 효과를 낼 수는 있다”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대국민 담화문 및 기자회견문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혀온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2007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귀혜씨는 박사논문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 시절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발표한 73개 담화문·기자회견문을 분석했다.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나온 발표문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23개로 가장 많았고,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 18개, 김영삼 전 대통령 14개 순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절망감을 생각하며 제 자신을 매질하고 있습니다”처럼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강조하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죄송·사죄·불찰·고개들 수 없음·부덕의 결과’ 등 매우 다양한 사과 표현을 했다.

‘굴욕 감수’ 전략을 가장 많이 택한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논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발표한 18개의 메시지 중 16개가 모두 사과나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전직 대통령들에게 사과는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하며, 사과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인 시절부터 박 대통령의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는 역풍을 맞거나 빛이 바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역사인식의 경우 사과를 하면서 동시에 박정희 정권의 업적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수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경선 후보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시절 잘잘못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 대치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박정희 정권 때 일에 대해 “이미 수없이 사과했다”고 말해 왔으나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국정 총책임자로서 사과의 핵심을 짚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지난 5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철저히 진상규명하고 관련자들이 응당 책임을 져야 함을 밝히며 사과 발언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윤창중 사건을 통해서 제기된 대통령의 인사 실패 논란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잘못된 인사를 강행한 대통령 본인에게 근본적 책임이 있는 만큼 인사 잘못에 대한 사과가 먼저다”라고 비판했다.

상황 질질 끌수록 부메랑 가능성
사과나 유감 표명의 적절한 시점 또한 놓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야권은 물론 여권 내부에서도 국정원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한편으로 정리를 좀 해주고 앞으로 관행이나 이런 부분을 명확히 개선해나가겠다는 것을 밝혀줄 필요가 있다는 게 당내 여론”이라며 “박 대통령이 위기에 강한 대통령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안을 질질 끌고 있다”고 말했다.

기초연금 공약 파기와 관련해서도 사과 시점이 너무 늦었다는 목소리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진영 전 장관의 사퇴파동까지 일어나며 기초연금 문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전에 솔직히 국민들에게 설득과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들이 매끄럽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박근혜 대통령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박 대통령이 문제를 더 키우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이 문제가 발생한 초기에 야당에 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만들어 나갔다면 오히려 국민들이 수용해주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며 “지금까지 문제를 스스로 예방적으로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왔던 것이고, 이제는 예방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시기도 넘어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실기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국민들의 의혹만 증폭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한 정치학과 교수의 말도 그랬다.

“처음 국정원 댓글 논란이 불거졌을 때 뜬금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 NLL 포기 발언 논란이 제기되면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까지 공개했잖아요. 그때 정권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감 표명 및 재발방지 대책, 국정원 개혁을 제시하고 종료시킬 문제에 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면서까지 국면을 전환해야 했을까. 그 뒤에 더 큰 의혹들이 숨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국 이는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손해보는 것은 대통령”이라며 “대통령은 야당보다 잃을 게 많다”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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