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초(우표)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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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우초라 쓰인 문위우표와 표기가 우표로 바뀌어 있는 태극우표.

대조선국 우초라 쓰인 문위우표와 표기가 우표로 바뀌어 있는 태극우표.

"우초 한 장 주세요”
요즘 우체국에 가서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우초? 그게 뭔데요”라는 반문이 돌아올 게 뻔하다.
‘우초’란 무슨 말인가. 이희승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초고(草稿)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돼 있다. 한자로는 愚草이며 다른 뜻은 없다.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도 없다. 그러니 “우초를 달라”고 하는 말 자체가 우리 언어생활에 없는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시계를 124년 전으로 돌리면 “우초 한 장 주세요”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대화문이다. 1884년 근대우편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 지금의 우표(郵票)를 우초(郵)라 이름지었기 때문이다. 우표의 옛 이름이 우초인 것이다.

당시 우초라는 말을 사용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만 해도 전면에 ‘COREAN POST’라는 영문과 함께 ‘대조선국 우초’라는 글자가 나온다. 최초의 우정관서인 우정총국 조직표에는 우초매하소(郵賣下部), 우초출납부라는 부서가 보인다. 우표에 관한 규정인 우정초표(郵征標)에는 ‘우초는 우정초표 매하소에서만 매매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우체국에 가서 “우표 한 장 주세요”라고 하면 오히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얘기다.
왜 우초라 명명했을까. 필자가 과문한 탓에 정확한 유래를 찾지 못했다. 초(鈔)라는 말에 ‘베끼다’라는 뜻과 ‘지폐’라는 뜻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유가증권의 의미를 담은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한자로 쓰인 우정총국의 현판.

한자로 쓰인 우정총국의 현판.

1984년 체신부가 발간한 한국우정 100년사를 보면 우초라는 용어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나와 있다. 까닭은 이렇다. 이 땅의 우편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정총국 초대총판인 개화파 홍영식이 고종에게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도 미국과 일본에 출장을 가 우편제도를 보고 자극받은 데서 비롯한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만큼 우편 용어도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올 법한 상황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정 100년사에는 “당시 체신관계 용어 제정에 있어 우리 국권의 자주독립을 견지하여 적절한 용어를 창안했다”고 적혀 있다. 우표는 우초로, 우편(郵便)은 우정(郵征)으로, 서류는 등기(謄記)로, 특사배달(特使配達)은 별분전(別分傳)으로, 우편함은 우정괘함(郵征掛函)으로, 배달부는 우체군으로 바꾸어 표현했고, 그밖에 집신(集信), 분전(分傳), 우낭(郵囊) 등의 독창적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한국 우정사의 최고 전문가인 진기홍씨도 ‘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이란 책에서 “우표를 우초, 우편국(郵便局)을 우정국(郵征局)이라고 하는 독창적 술어(述語)를 만들어 외국 모방을 피한 점은 훌륭한 태도”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우초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지되었다가 10년 뒤인 1895년 우편사업이 재개될 때는 우초 대신 우표라는 말이 사용됐다. 그해 6월 중앙에 태극기, 4각에는 왕실의 문장인 이화(李花)가 그려진 4종의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이를 태극우표(太極郵票)라 칭한 것이다. 독창적 용어라고 평가받던 우초는 그렇게 역사 속의 용어가 되어버렸다.

우정총국에서 ‘우정’이란 한자가 지금 쓰이는 郵政이 아니라 郵征이란 점도 특이하다. 일부 국어사전에까지 郵政總局이라고 잘못 표기할 정도로 郵政이라 써야 했을 것 같은 한자를 굳이 郵征으로 쓴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우리 근대 우편에 관한 기록들이 갑신정변으로 불에 타 없어지는 바람에 역사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주변국을 살피면 중국은 郵政局이라 표시했고, 일본은 중앙기관을 역체국(驛遞局), 현업기관은 우편국(郵便局)이라 불렀다. 우리는 우정총국이 있기 전 우정사를 설치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한자를 郵程司로 쓴 바 있다. 그러니까 郵征은 이도 저도 아닌 셈이다. 진기홍씨는 “정(征)의 자의(字義), 즉 ‘세 받는다’는 뜻을 생각할 때 요금을 받고 신서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郵征이라 쓴 것으로 보인다”며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 ‘다스린다’는 뜻의 政을 버리고 征을 택한 것은 그 자체로 획기적이며 민주주의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우정의 역사는 파고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흥미롭다.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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