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과 녹색의 ‘결혼 전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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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연합(2)

첫눈에 통한 두 환경단체의 대통합… 운동성과 전문성 두 마리 토끼를 잡다

1994년1월 19일 혹한의 날씨에 서울 노량진취수장 앞 한강에서 배달환경연합 소속 ‘녹색전사단’ 이 수돗물 정책에 항의하는 수중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1994년1월 19일 혹한의 날씨에 서울 노량진취수장 앞 한강에서 배달환경연합 소속 ‘녹색전사단’ 이 수돗물 정책에 항의하는 수중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까짓것 그냥 들어가면 되지.’

남상민(현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 환경담당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젖은 팬티를 이미 벗어버린 뒤라 다시 입을 수 없었고, 티셔츠를 내리면 중요한 부분을 감출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벌써 세 번째였다. 세상에 사진기자가 이렇게 많은 줄은 환경운동을 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한강 물에 몸을 담그는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진기자가 몰려왔다. 1994년 1월 19일 서울 노량진취수장 부근에서 벌어진 이 수중 퍼포먼스는 배달환경연합 소속 ‘녹색전사단’이 정부가 발표한 ‘물대책’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상민은 얼음 물에 들어간 5인의 녹색전사단원 중 한 명이었다. 암벽전문가나 UDT·해병대·공수특전단 출신으로서 체계적 훈련을 통해 단련된 단원과 달리 그는 백면서생의 활동가였다. 수중시위 참여는 만용이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사진 촬영이 끝날 때까지 잘 버텨냈다.

남상민의 ‘노팬티’ 퍼포먼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무사히 퍼포먼스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뒤늦게 ㄱ일보 사진기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5명의 단원은 다시 한강에 들어가 퍼포먼스를 재연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이번에는 ㅎ방송 기자가 허겁지겁 도착했다. 이미 팬티까지 벗어던졌던 그는 세 번째 연출부터는 ‘노팬티’로 물 속에 들어갔다.
‘환경운동은 재미있어야 한다!’

장원(현 녹색세상 대표이사)이 환경운동에 뛰어들면서 내세운 5대 슬로건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환경운동’ 외의 나머지 슬로건은 ‘대안 있는 환경운동’ ‘아름다운 환경운동’ ‘생활 속의 환경운동’ ‘함께 하는 환경운동’이다.

낙동강 하구둑 난간에 밧줄로 몸을 묶어 매달리고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플래카드를 펼치는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동원된 스릴 만점의 퍼포먼스는 무미건조한 시위 일변도의 환경운동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남상민의 알몸(?) 퍼포먼스는 녹색전사단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출정식이자 환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이었다.

이런 ‘새로운 환경운동’의 기획자이자 연출가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장원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그 스스로 “10년 동안 원 없이 했다”고 말하듯이 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긴 ‘스타 환경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말쑥한 외모와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 넘치는 아이디어, 반짝이는 언어 감각, 뛰어난 연출력, 무서운 추진력…. 그는 대중운동가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딱 한 가지 없는 게 있었다.

그는 환경운동권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었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환경공학과 76학번인 그는 후배들보다 한참 늦은 1989년에야 환경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학 생활도 특별하다고 할 게 없었다. 3년 후배인 구자상(현 부산환경운동연합 상근대표)과 달리 환경운동이나 학생운동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배달녹색연합(녹색연합의 전신)으로 통합한 3단체의 대표자들. 왼쪽부터 배달환경연구소 장원 소장, 푸른한반도 김제남 대표, 대한녹색당 송순창 창당준비위원장. <김재구 기자>

배달녹색연합(녹색연합의 전신)으로 통합한 3단체의 대표자들. 왼쪽부터 배달환경연구소 장원 소장, 푸른한반도 김제남 대표, 대한녹색당 송순창 창당준비위원장. <김재구 기자>

‘늦깎이’ 장원의 ‘재밌는 환경운동’

환경문제에 일말의 관심을 가진 것도 대학원 때였다. 그는 1984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김정욱 교수(현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대표)가 지도교수였다. 그러나 환경운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때는 미국 유학 시절이었다. 1986년부터 필라델피아주 드럭설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면서 그린피스나 시에라클럽 등 외국의 환경단체와 환경운동을 접하게 됐다. 이를 유심히 본 그는 유학생 친구들에게 “돌아가면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특이한 것은 그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가서 공부한 반공해 운동권 출신 유학생들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대학 시절 열심히 운동을 했던 반공해 활동가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 흐름이었다. 그런데 대학 시절 운동과 전혀 인연이 없던 사람이 학위까지 따서는 돌아가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하니….
박사학위를 받고 1989년 9월 귀국한 그는 국내 환경운동을 면밀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배움마당에도 등록해 다니고 환경과공해연구회(이하 환공연)에도 참여했다. 가나안농군학교에 자원 입소해 전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환경단체를 두루 돌아본 그는 방향을 정했다. 민주화운동의 일환도 아니고 운동권 출신으로서도 아닌 교수로서 합리적이고 대안을 제시하는 환경운동을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차별화도 되고 다른 환경단체가 다루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공추련은 좀 생경한 부분이 있었다. ‘아, 이런 식으로도 운동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공추련 가기 전 대학원 시절에 최열씨를 찾아간 적이 있다. 환경운동이 핍박·감시받을 때였다. 찾아가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같이 간 사람이 운동권 출신이었는데 가니까 혼자 있었다. 환경운동의 어려운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 기억이 난다.”

장원의 최근 회고다. 일찍부터 주류 반공해 운동권과는 다른 방식을 추구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운동권과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지 못했던 그는 시작을 전문가 중심의 연구단체로 했다. 1991년 6월 15일 대전에서 출범한 배달환경연구소가 그것이다. 그는 1990년부터 대전대 교수로 가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배달환경연구소 창립 시점이 김제남(현 녹색연합 사무처장) 등이 ‘푸른 한반도 되찾기 시민의 모임’(이하 푸른한반도)을 띄운 것과 거의 일치했다.

배달환경연구소의 주축은 그의 서울대 환경대학원 동기인 정종관(현 충남발전연구원 연구위원), 부산수산대 동기인 구영기(현 하천연구센터 연구기획실장) 등 그의 지인들이었다. 박은주(현 김영사 사장)도 초기부터 참여한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처음에 그가 주력한 일은 환경분쟁을 중재하는 것이었다. 즉 민간 차원의 환경영향평가 작업이었다. 그동안 정부나 기업의 전유물이었던 환경영향평가는 피해 주민이 신뢰하지 않아 분쟁을 악화시키기 일쑤였다. 배달환경연구소는 이 작업을 통해 금강 제2휴게소와 충주 능암호 쓰레기 매립장 등의 건설을 백지화시켰고, 첨예한 갈등을 빚은 김포 쓰레기 매립장 사태의 중재를 이끌어냈다.

1993년 3월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배달환경클럽 전국 조직 결성식. <경향신문>

1993년 3월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배달환경클럽 전국 조직 결성식. <경향신문>

‘대안 있는 환경운동’을 기치로 내건 그의 이런 활동은 서서히 언론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2년 만에 회원이 3000여 명으로 불었다. 서울·부산 등 전국 12개 도시에 지부가 생기자 그는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겨 1993년 3월 정식으로 배달환경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조직을 띄우기에 이르렀다. 배달환경클럽은 그해 6월 배달환경연합(대표 노융희 서울대 교수)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런데 조직은 승승장구했지만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환경문제를 다루다 보면 정부나 기업과 싸움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에게 없는 것이 이것이었다. 바로 대정부·대기업 투쟁력이었다. 조직이 커질수록 그 빈 자리가 더 크게 보였다.

이 즈음 김제남·김혜애(현 녹색연합 정책실장)·최승국(현 녹색연합 협동사무처장)의 푸른한반도 3인방도 환경보호·생명존중·평화사랑 세 가지를 기치로 삼아 착실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1993년 초 이들은 대전에서 ‘창발성(창의성의 북한말)’을 갖고 운동을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장원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첫눈에 서로 ‘통’했던 것일까. 이들이 뒤풀이장에서 농담처럼 나눈 대화가 진담이 돼버렸다. 양쪽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푸른한반도는 운동성이 강한 반면 전문성이 약했고, 배달환경연구소는 전문성은 강하지만 운동성이 약했다. 서로의 강점은 상대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던 참에 누군가가 말했다.
“양쪽이 합치면 되잖아요. 그럼 잘할 수 있겠네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조직을 통합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반드시 반대자가 나오고 갈등이 따른다. 컬러가 다르면 다른 대로 같으면 같은 대로 반목이 싹트고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1+1=3이 되면 좋겠지만 자칫 1+1=0이 될 수도 있다. 농담으로는 재밌는 화제지만 진담이 되면 그것은 심각한 논제로 변한다.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먼저 합방을 해보는 게 어때요.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수도 있잖아요.”
“맞아! 그러다 안 맞으면 갈라서고….”
“하지만 그건 불륜이잖아.”
“내가 하면 로맨스 아닌가?”
“하하하!”

이런 식으로 오간 농담이 현실화됐다. 푸른한반도가 서울 신수동 배달환경클럽 사무실로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두 조직이 사무실을 함께 쓰면서 약 1년 동안의 ‘결혼 전 동거’가 이뤄진다.

이 두 조직의 결합에 촉매 구실을 한 또 하나의 영역이 있었다. 녹색당 창당을 준비하던 송순창(현 대한조류협회장)의 녹색 이념과 철학이었다. 그는 김제남에게 환경생태주의를 일깨워준 조언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제남은 ‘새 박사’이면서 녹색당의 꿈을 갖고 있던 그의 훈수를 듣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최열이 하는 것은 인간 환경운동이지… 당신의 환경운동은 생태계 전반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1993년 4월 배달환경연구소가 김포 수도권 매립지 판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1993년 4월 배달환경연구소가 김포 수도권 매립지 판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송순창의 생태주의와 녹색 이념에 감화를 받은 김제남이 그를 장원에게 소개했다. 죽이 맞은 세 사람은 굵은 소금을 뿌려 구운 돼지 목살 안주에 소주를 자주 먹으며 의기투합했다. 1994년 4월 1일 발족하는 배달녹색연합은 공식적으로 푸른한반도와 배달환경연구소, 대한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의 3자 통합 형식을 취한다. 장원은 사무총장, 김제남은 사무부총장, 송순창은 생태위원장을 각각 맡는다.

지금은 녹색당의 꿈을 접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서식하는 조류 탐구에 몰두하는 송순창은 곡절이 많은 사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대 독어과(59학번)를 나온 그는 한동안 독일어 교사 생활을 했다. 교육자로서 큰 굴곡 없이 살 수 있었던 그가 대한조류협회를 창립하고 녹색당 창당에까지 뛰어든 데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인생의 파란은 장준하 선생과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고교 졸업 후 그는 장 선생의 수발을 들면서 뒷날의 중앙정보부보다 더 악랄했다는 서울 누상동 방첩대에 걸핏하면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계속 서울에 있다가는 언제 죽을지 몰라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날인 1960년 4월 18일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밀항에는 성공했지만 곧 불심검문에 걸려 재판을 받고 이듬해 11월쯤 국내로 송환된 그는 남은 학업을 마치고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런데 무학여고에 재직하던 1969년 3선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연금이나 다름없는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됐다.

1980년 4월 해금통지서를 받기까지 10여 년의 연금 기간에 그는 선인장과 새를 키웠다. 선인장 세 뿌리가 해금될 때 212평 비닐하우스에 꽉 찰 정도로 늘었고, 금화조 한 쌍이 1200쌍이 됐다. 새는 자유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키웠고 선인장은 시대의 상처를 그 가시의 아려오는 아픔에 달래려고 심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특히 새를 기르면서 흥미를 느낀 그는 경희대 원병오(현 명예교수)·윤무부 교수 등 조류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대한조류협회는 이렇게 알게 된 인맥을 바탕으로 뒷날 창립한 것이었다.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다른 것은 정치활동이니까 환경·생태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해금되고 난 뒤에도 긴 공백 때문에 다른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환경운동 쪽으로 움직였고 김정욱·최열·서진옥씨도 그때 알게 됐다. 나중에는 이렇게 운동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녹색당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페트라 켈리에게 서신을 보내….”

그가 페트라 켈리의 초청으로 서독에 가서 녹색당 관계자들을 만나고 50여 권 분량의 자료를 받아온 얘기는 유명하다. 최근 그는 “한국에서 녹색당을 만들기는 어려운 것 같다”며 1989년부터 4년여에 걸친 창당 작업의 험난했던 과정을 토로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가 녹색당 대신 녹색연합 결성에 참여한 내막이 여기에 있었다.

배달환경연구소와 푸른한반도의 ‘결혼 전 동거’는 대만족이었다. 금실도 좋고 궁합도 기가 막히게 맞았다. 장원은 “푸른한반도 3인방에게 운동성이 있었다”며 “운동 경험이 없는 내가 인복이 있어 (운동을) 편하게 했다”고 최근 회고했다. 김혜애도 “장원 선생은 환경·생태적 마인드가 강했고 운동은 몰랐다”며 “양쪽이 상호침투돼 조화를 이뤘다”고 말했다. 녹색연합은 이 ‘결혼 전 동거’ 시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새 날개 편 한국 녹색당의 꿈

“배달환경연구소는 연구 활동과 환경분쟁 해결 등 전문성과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펼쳤고, ‘푸른 한반도 되찾기 시민의 모임’은 청년·직장인들을 중심으로 ‘평화사랑, 생명존중, 환경보호’의 기치를 들고 회원이 중심이 되는 참여형 운동으로 활동하였다. 1994년 통합을 전후하여 대중성·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시의적절하게 부응하여 서로의 장점을 계승….”(녹색연합 창립 10주년 자료집, 우리들 노래는 생명의 깃발, 2001년)

두 단체는 배달환경연구소의 ‘배달’과 푸른한반도의 ‘녹색’을 합쳐 ‘배달녹색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된다. ‘배달환경’은 배달민족의 깨끗한 토박이 환경을 되찾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구환경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면서 민족적 지향성이 담긴 ‘배달’이라는 개념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1996년 4월 ‘배달’을 버리고 녹색연합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장원의 등장은 단순히 녹색연합에 전문성을 부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환경운동 전반의 지형을 뒤흔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녹색연합의 급성장은 주류 환경단체인 환경운동연합에 자극을 주었고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환경운동의 파이를 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원이라는 스타플레이어의 몫이기도 하다.

“장원 선생이 터무니없는 것을 시키기도 했다. 한 번은 갑자기 ‘녹색순례를 하자!’고 했다. 환경운동가들이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고 했다. 정세를 읽고 판단하는 데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다. 녹색연합을 알리는 많은 이벤트가 장 선생의 머리에서 나왔다.”(김혜애 녹색연합 정책실장)

“아이디어가 많고 순발력이 뛰어났다. 단점이라면 쇼맨십인데, 김포매립지에 들어가서 산다든가 하는 것들이 환경운동을 위한 연출로 생각할 수 있다. 한복이나 목도리 같은 옷차림도 운동가로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한 훌륭한 연출로 볼 수 있다. 좋은 운동가를 잃은 것이다.”(최열 환경재단 대표)

최열과 장원은 여러 점에서 스타일이 다르지만 눈에 띄게 닮은 점이 있다.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그만큼 환경이 나빠진다”는 원칙에 철저하다는 것이다. 환경운동권에는 두 사람이 후배 활동가들에게 자주 한 말이 어록처럼 전한다.

“말로는 돌멩이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최열)
“일단 가자! 생각은 뛰어가면서 한다!”
(장원)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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