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권 민중학살 주범 28년 만에 ‘단죄’ 주목
캄보디아의 잔혹한 민중 학살 ‘킬링필드’가 역사의 심판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유엔 국제전범재판소는 지난 20일, 1970년대 후반 기아와 학살로 170만 명을 사망케 한 크메르루주 정권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앞서 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정권의 지도자인 키우 삼판 전 대통령, 누온 체아 전 공산당 서기장 겸 최고 이론가 등을 연이어 기소, 체포했다.
악명 높은 정권의 1인자 폴 포트는 비록 1998년 사망했지만 주요 지도자 5인 가운데 4명을 체포하고 본격적으로 심리를 시작, 2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침내 이들을 단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킬링 필드‘죽음의 들판’을 뜻하는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의 공산 정권인 크메르루주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44개월의 통치 기간에, 캄보디아인 100만 명을 기아와 질병, 가혹한 노동과 처형으로 잔혹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정국 혼란을 거쳐 70년, 미국을 등에 업은 론 놀 장군의 쿠데타로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는다. 서방에 억압받는 캄보디아의 현실에 분노하고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사상에 심취한 폴 포트는 반군을 조직해 활동하며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그는 1975년 집권하자 ‘농촌 기반의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모델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를 선포하고 극단적 실험에 들어간다. 그는 화폐를 없애고 도시를 폐쇄했다. 수도 프놈펜의 주민 300만 명은 이주 통보를 받은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 시골의 집단 농장에서 노역해야 했다. 크메르루주는 이에 반대하는 지식인, 고위층, 전문가들을 모두 처형했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해 굶어죽은 양민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때 형성된 집단 무덤은 지금도 캄보디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훈센 현 총리 세력이 붕괴시켰다.
마침내 재판 구성 유엔은 20일 킬링필드 주역에 대한 국제전범재판소 설치를 완료하고 첫 공개 심리를 시작했다.
1997년 캄보디아 정부가 전범재판소를 설치하도록 요청한 이후 10년을 끌어온 숙원이 풀린 셈이다. 캄보디아는 재판소 설치를 요청하긴 했지만 재판단을 구성하는 문제에서는 유엔과 마찰을 빚었다. 유엔은 킬링필드를 인권범죄로 규정, 전쟁범죄 법정을 설치하라고 요구했지만 캄보디아 측은 국내법에 따른 재판을 주장했다. 결국 2003년 양측의 제안을 절충해 ‘국제 차원의 국내 재판정’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예산 역시 문제여서 지난해에 들어서야 일본, 호주 등 각국의 지원금 5600만 달러를 확보하며 본격적으로 준비해나갔고, 마침내 재판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첫 심리 대상은 일명 ‘덕’으로 알려진 카잉 켁 이아브 전 검찰총장이었다. 그는 프놈펜의 악명 높은 ‘투올 슬렝’ 수용소를 지휘하며 1만7000여 명의 국민을 고문하고 처형한 혐의를 받고 있다.
피터 포스터 전범재판소 대변인은 “첫 심리를 연 오늘은 전범재판소의 기념비적인 날”이라며 “세계의 관심이 캄보디아에 모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로버트 페팃 검사는 “이제서야 정의가 바로 세워졌다”며 “앞으로 재판 과정이 모든 캄보디아인에게 투명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범재판에 기소된 피고인은 크메르루주 정권 최고위직을 지낸 6명이다.
덕을 비롯, 주역인 폴 포트에 이어 2인자인 누온 체아 최고 이론가, 키우 삼판 전 대통령, 이엥 샤리 전 외무장관과 부인인 이엥 티리트 전 사회부 장관, 타목 전 군사령관이 그들이다.
덕은 지난 7월 체포됐으며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 이엥 부부는 지난주 모두 체포됐다. 하지만 폴 포트는 1998년, 타목은 지난해 이미 사망해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피고들은 책임 회피 체포된 이들이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데다 현 정권 역시 크메르루주와 무관하지 않아 재판이 순조로울지는 의문이다.
지난 19일 체포된 키우 삼판 전 대통령은 저서를 통해 크메르루주 정권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민주 캄푸치아 시대까지의 캄보디아 역사 회고’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크메르루주는 국민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책에서 “나는 껍데기에 불과했으며 크메르루주의 잔혹함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항변했고 “주민 이주 정책은 간첩 책동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대량 학살 지시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투올 슬렝에 대한 2003년 보고서를 보고 나서야 정권의 실상을 알았다”며 “나는 어떤 학살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폴 포트에 대해서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외적과 싸운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그는 오히려 현 정권에 대해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하다고 비판했다. “소수의 부자와 권력자만이 부를 움켜쥐고 약물과 퇴폐적인 밤문화만 자리 잡았다”고 날을 세웠다.
키우 삼판은 195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마르크스 이론에 빠져 귀국한 뒤 크메르루주에 가입,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는 정권이 붕괴한 후에도 베트남과 정부에 맞선 투쟁 대열에 나서며 크메르루주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심리에 나선 덕 역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며 발뺌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도 재판의 걸림돌이다.
캄보디아에서는 현 훈센 정부 내에서도 크메르루주 출신이 상당수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훈센 총리 자신도 크메르루주 전사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재판 내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앞으로 3년간 치를 재판 과정에서 적지않은 반발이 예상된다.
<국제부┃박지희 기자 viole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