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갑부들 “가자 영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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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불확실성 피해 ‘재산 도피처’로… 부자 30만명 런던에 주택 구입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5년 5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러시아 최고 부자이자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 중 하나인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만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5년 5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러시아 최고 부자이자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 중 하나인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만나고 있다.

"러시아 벼락부자들의 사는 법을 보려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영국 런던으로 가라.”
30대, 40대의 나이에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쥔 러시아 부호들의 영국행이 가속화되고 있다. 12월 총선과 내년 봄 대통령선거 등 정치 일정을 앞두고 러시아 정국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자신들의 자산을 지켜줄 ‘도피처’로 영국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러시아 마피아들의 창궐 또한 치안이 더 안전한 곳으로의 이전을 부채질하고 있다. AP통신과 가디언 등 유럽 언론들이 연이어 ‘영국 속의 러시아 별천지’를 조명하고 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41)는 러시아의 최고 부자이자 살아 있는 유대인 가운데 가장 돈 많은 사람이다. 이제 갓 마흔 살을 넘긴 그의 자산은 약 200억 달러(18조2000억 원)로 세계 갑부 순위 16위다. 그러나 그의 부를 보려면 러시아가 아니라 런던을 방문해야 한다.

자산 투자액도 최소한 수십억 달러

아브라모비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유명한 축구 구단 중 하나인 첼시의 구단주다. 그는 한때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보유했던 400에이커(178400㎡)의 땅을 포함해 런던과 주변 전원지역에 3000만 달러 안팎의 고급저택을 여러 채 갖고 있다. 러시아의 동쪽 끝 추코트카주 주지사이기도 한 그는 런던에 살면서 가끔 5600만 달러짜리 보잉 767 여객기를 개조한 전용기를 타고 그곳으로 출퇴근한다. 그는 이마저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기내에 욕실과 와인바, 킹사이즈 침대 등을 갖춘 3억 달러대(2800억 원)의 최신 초대형 여객기 A380을 주문한 상태다. 축구 경기장을 찾아가거나 종종 영국 내 자신의 저택들을 오갈 때는 대당 3500만 달러짜리 전용헬기 2대나 6000만 달러 이상인 호화 요트 3대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영국에 사는 다른 러시아 부호의 딸과 바람을 피우다 아내에게 들켜 합의이혼하면서 약 9조5000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위자료를 주기도 했다.
모스크바 MDM뱅크 소유주인 안드레이 멜리첸코(35)는 영국 버크셔 자택에서 열린 아내의 생일파티에 할리우드 스타 제니퍼 로페즈를 초청, 축하공연을 하게 했다. 로페즈는 40분 공연의 대가로 200만 달러(18억 원)를 받았다. 멜리첸코의 재산은 46억 달러로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갑부 순위 172위에 올라 있다.

한 투자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지난해 각각 200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저택을 포함해 316건의 부동산을 사들였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이 된 첫해인 2000년에는 러시아 부자들의 부동산 구입이 불과 65건밖에 되지 않았다.
억만장자 10여 명을 포함해 30만 명 안팎의 러시아 부자들이 런던에 집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조사 결과도 최근 나왔다. 영국 내 자산 투자액만 최소한 수십 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 부자들에게 우호적인 영국 조세제도의 보호망이 그들의 자산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사립고교 입학 러시아 학생 급증

200억 달러의 자산으로 러시아의 최고 부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인 첼시를 인수한 뒤 축구장을 찾아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0억 달러의 자산으로 러시아의 최고 부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인 첼시를 인수한 뒤 축구장을 찾아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영국 내 나이트 프랑크 투자회사의 러시아 고객 전문 부동산 에이전트인 그레이스 마르골리스는 “2008년을 앞두고 러시아 부자들이 자신들의 자산을 안전한 장소에 놓아두기를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런던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시장경제화를 위해 석유·금융·건설 등의 국유재산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정경유착을 통해 떼돈을 번 신흥 갑부들로 ‘올리가르히’로 불린다. 이들은 푸틴 대통령이 강력한 정부 장악력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러시아 내에서 그들의 돈이나 가족이 안전한지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다. 러시아는 아직도 1억5000만 인구의 25%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추운 날씨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러시아 남성들이 보드카에 면도 후 바르는 에프터셰이브와 향수, 세정제 등까지 섞어 마시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 사례가 빈발하는 터라 부호들의 삶은 반감을 넘어 적개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푸틴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가고 내년 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런던은 러시아 부호들 사이에서 더더욱 도피처로 주목받고 있다.

부동산 에이전트인 마르골리스는 “러시아 부자들이 런던에서 집들을 둘러볼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보안장치”라고 전했다. 현관을 지키는 도어맨은 기본이고, 최첨단 경보 시스템과 폐쇄회로 TV를 통한 감시망은 필수다. 영국기숙학교연합회장인 힐러리 모리어티는 “자녀들을 영국 내 사립학교와 대학으로 보내려는 러시아 부모들이 급증하면서 안전은 한층 중요한 저택 구입의 기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사립고교 등에 다니는 러시아 부자들의 자녀는 그간 계속 늘면서 2006~2007 학기 초에 학생 383명이 등록했다. 영국 내 대학에는 현재 2000명 이상의 러시아 학생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부호들 사이엔 2년 전 발생한 ‘슬레사레프 일가족 몰살사건’이 큰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 소드비즈네스뱅크 소유주로 거부였던 알렉산더 슬레사레프 부부는 영국 요크시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다 잠시 귀국한 10대 딸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괴한들의 무차별 총탄세례를 받고 현장에서 모두 즉사했다.

런던에서 살고 있는 러시아 부자들은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 재현되고 있는 옛 소련시절의 공포문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어지내듯 비밀스럽게 지내려 한다. 영국인 이웃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러시아인임을 드러내는 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해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으로 영국에 망명, 푸틴정부를 비판하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방사능 물질에 중독돼 독살을 당하자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영국은 당시 리트비넨코 암살의 유력한 용의자인 안드레이 루고보이를 넘겨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러시아에 대해 거세게 비난했다. 그러자 러시아도 역시 영국에 대해 러시아에서 부패와 탈세 등의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과 테러리스트들을 위한 방패막이가 돼주고 있다고 반박했다. 외교관 맞추방 등으로 양국이 냉전 이래 최악의 외교관계에 돌입하면서 ‘영국 내 러시아인’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쏠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제부┃이재국 기자 nostalg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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