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마당

일본 때리기의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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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가 최근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일시위에 제동을 걸고 나선 모양이다. 리자오싱 외교부장이 ‘중일관계를 발전시켜야 국가발전이 계속 확보된다’고 발언한 이후 베이징대학의 일본 비판 특강이 취소되고 상하이 시당국은 시위에 피해를 본 일식점에 대한 피해보상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엊그제만 해도 심상찮던 중국의 일본 때리기에 비하면 어리둥절할 정도의 변화다. 중일 외무장관회담에서 일본측이 중국시위대에 의한 주중일본대사관 건물 훼손에 사과를 요구해도 오히려 일본의 신사참배를 강하게 비판하던 중국정부다. 게다가 제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만주지역에서 생체실험을 했던 마루타현장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다거나 중국 관변 연구기관들은 일본의 우경화에 강력히 대처하는 방안으로 정경분리정책의 폐기를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일본의 새역사교과서문제가 발단이 돼 한달 남짓 전개됐던 동북아 3국의 갈등은 또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가? 새로운 돌발적인 변수만 없다면 과거의 경험칙상 이런 마무리가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일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한국에서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중국에서는 전역에서 반일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일본의 새역사교과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대응방식이 일회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일본 때리기 방식이 변화하지 않고는 오히려 일본의 우경화세력들의 결속만 불러오는 꼴이다. 일본에 귀감을 삼으라고 독일의 사례를 제시하지만 그 역시 소귀에 경읽기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의 양심을 지키게 한 것은 독일인보다는 오히려 나치 시대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의 끈질긴 노력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크라임 스토리’의 주인공 비젠탈은 유대인이다. 바로 16년 동안 추적해 남미에 숨어살던 대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독일법정에 세운 인물이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유대계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만든 ‘쉰들러 리스트’는 나치 대학살의 직접적 고발보다는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한편으로 한때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이 유대인을 구출하는 휴머니티에 초점을 맞춰 화제를 모았다.

물론 유대인들이 전세계에 걸쳐, 특히 미국사회의 정·관계, 언론계, 금융계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이 큰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 등 유럽 지역의 유대인 수용소를 기념관으로 만들고 이를 나치 고발의 역사교육장이자 홍보현장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홍보관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무려 20여개가 있다.

유대인들의 나치 고발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나치에 대한 고발방식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간주의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우리나 중국의 일본 때리기가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에 머물고 있는 점과는 확연하게 다른 셈이다. 그렇다 보니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대해 미국 등 제3국 역시 국가 대 국가의 이해다툼 정도로 치부하는 감이 적지 않다.

일본 또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에는 그렇게 소란을 피우면서도 제2차대전 당시 조선인 강제징용이나 중국에서 저지른 난징대학살 등으로 수천배 수만배나 많은 이웃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강제징용은 물론 군위안부를 비롯한 각종 고문과 학살, 마루타와 같은 반인륜적 생체실험 등은 분명 반인류적·반인간적 죄악으로 단죄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일본 때리기가 민족적·국가적 범주에 머물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상문 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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