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세대 비사(1) 서울대 관악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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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부정-반대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이를 보도하는 것까지 일체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이 조치는 10-26 사태의 결과로 1979년 12월 8일 해제되기까지 4년 7개월 동안 수많은 학생-시민-민주인사를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이 시기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 800명이 넘고, 감시-연금-연행-고문-수배-징집 등의 고통을 당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엄혹했던 이 시기의 역사는 1980-90년대 격동기를 지나면서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당시 대학생으로서 가장 처절하게 저항했던 이른바 '긴급조치 9호 세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현재 40대 중반~50대 중반의 사회 중추세력으로 성장한 긴조9호 세대는 더 이상 '은둔세대'로 머물 수 없게 됐다. 외적으로 철저한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내면에서 뜨겁게 사고하고 실력을 다져온 이들 세대는 이제 사회 각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대정신과 일맥상통할 뿐더러 우리 정치와 사회 변화의 방향을 가늠하는 하나의 좌표가 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리더그룹으로 떠오르는 긴급조치 9호 세대의 치열했던 삶의 역사와 현 주소를 조명하는 이 기획 시리즈는 1993년 9월부터 10개월에 걸쳐 본란에 연재한 '신권력층의 뿌리-문민 실세들의 형성 비사'의 제2부 격이기도 하다. [편집자]


"누가 길을 묻거든, 조국의 장래를 묻거든 저기 저기 눈 들어 관악의 푸른 하늘을 보게 하라."

서울대학교가 캠퍼스 종합화의 오랜 숙원을 실현하던 날, 서울대학보인 [대학신문]은 그 벅찬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1975년 봄 관악산 자락 자하골 일대에 거대하게 조성된 새 캠퍼스로 이전한 서울대는 관악 시대 개막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웅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긴급조치 9호 세대 비사(1) 서울대 관악 1세대

관악 1세대. 서울대 75학번.

이들의 운명이 이날 날씨처럼 고약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2.9 대 1의 경쟁을 뚫고 관악의 첫 주인이 된 전국의 수재들, '조국의 장래'를 물어야 할 이들 3,236명의 동량에게 관악의 하늘은 끝내 푸르름을 보여주지 않았다. 유신체제, 그 중에서도 가장 엄혹한 긴급조치 9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캠퍼스에서, 거리에서, 감옥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까지 '긴조9호'라는 망령이 그들을 압살했고, 그 속에서 신음하는 사이 시대는 그들을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8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졌던 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선배 세대인 4-19, 6-3, 71, 민청학련 세대보다 영웅적이지도, 후배 세대인 386, 한총련 세대보다 화려하지 못해 '무명세대'로 불렸던 '긴급조치 9호 세대'. 이제 그 비극적 운명의 장막이 걷히고 있다.

미래의 '강효리' 강금실(법무부 장관)은 인문-사회계열 통틀어 20명도 안 되는 동기 여학생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재목이었다. 아담한 체구에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강단이 배어 있었다. 고교 때 줄곧 선두자리를 다퉜던 조배숙(민주당 의원)-김영란(대전고법 부장판사)도 관악에서 다시 만났다. 이들 경기여고 63회 3인방은 뒷날 사법시험에도 차례로 합격해 법조계에서 한솥밥을 먹는 기연을 연출한다.

서울대 75학번 중 서동만(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은 강금실과 30년이 다 돼가는 술친구로 유명하다. 서동만의 어머니는 강금실의 중학교 은사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이념 서클에 가입해 의식을 가다듬었던 서동만은 4학년 때인 1978년 5-8시위를 주동, 감옥행을 자청한다. 이때 그에게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형을 선고한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판사가 바로 지금의 고영구 국정원장이다.

서동만의 경기고 1년 선배이자 뒷날 인권변호사로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서 시민사회운동의 선봉에 서는 박원순(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도 관악 1세대이다. 하지만 제대로 학교도 다녀보지 못하고 관악을 떠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참여연대와 쌍벽을 이루며 1990년대 시민사회운동을 이끌어온 '경실련맨' 유종성(전 경실련 사무총장)과 학계로 진출해 줄기차게 시민사회운동의 이론적 지평을 열어온 조희연(성공회대 교수)은 1978년 10월 광화문 데모 미수 사건의 '공범'이 된다. 이밖에도 김석준(민주노동당 부산시지부장)-양민호(청와대 민원비서관)-이병호(농림부 장관 정책보좌관)-이우재(전 인사련 부위원장) 등이 75학번 동기 그룹이다.

현재 서울대 긴급조치 9호 세대는 관악민주포럼이라는 친목모임을 통해 암울했던 시기의 경험과 시대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75학번은 약 80명. 대부분 학창 시절 몸을 던져 긴급조치에 저항, 옥살이를 자초한 면면들이다.

긴급조치 9호 세대 비사(1) 서울대 관악 1세대

기업에 안착한 이는 최규덕(국민은행 대전콜센터장)-김수천(아시아나항공 인사팀장)-부윤경(삼성물산 프로젝트사업부장) 등이 대표적이다. 사업으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서울대 긴조9호 세대 75학번으로는 변재용(한솔교육 대표)-유인택(기획시대 대표)-박창기(세코이아 대표)-임국진(창의와 탐구 대표) 등이 있다.

이들이 입학할 무렵 학내외의 사정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약 30년간 정들었던 동숭동 캠퍼스와 '단장의 이별'을 하는 것이 재학생들에게는 못내 서운했다. 동숭동 캠퍼스의 마로니에와 4-19탑은 서울대생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자유와 진리와 낭만의 상징이었다. 더욱이 동숭동 시대가 마감되면서 학생운동의 심장부이자 사관학교였던 문리대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졌다. 1946년 발족해 1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문리대는 1975년 신학기부터 인문-사회-자연과학대로 분리-해체됐다.

음모론적 시각으로는 이 모든 것이 학생 데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교활한 조치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문리대를 쪼개어 학생운동의 역량을 분산시키고 캠퍼스를 서울 중심가 진출이 불가능한 구석으로 몰아넣은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캠퍼스가 채 정비되기도 전에 정문 앞에 '동양 최대의 파출소'가 들어선 것만 보아도 음모론의 논거는 충분했다.

새 캠퍼스가 군대 막사처럼 천편일률적인 콘크리트 구조물로 이뤄진 것도 학생들에게는 눈꼴사나웠다. 편의시설이 엉망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강의실을 옮겨다니기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강의실을 찾느라 교수와 학생이 함께 건물 사이와 복도에서 헤매는 일이 잦아 '교수-학생 연합데모 연습이냐'라는 우스개까지 나올 정도였다.

정국 상황은 더욱 딱했다.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로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2월 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어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중 인혁당 사건 연루자와 반공법 위반자를 제외한 148명 전원에 대한 석방 조치가 단행됐다.

3월 새 학기 개강과 함께 대학가가 술렁이기 시작하자 당국은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등 강경책을 구사했다. 4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7호를 발동, 고려대에 군까지 투입했다. 이날 사형이 확정된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이튿날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 정국은 공포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는 뒤이어 닥칠 참담한 운명의 서막일 뿐이었다. 4월 11일 서울농대 김상진이 양심선언 후 할복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4월 30일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 정권은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 초헌법적 통치체제를 구축한다. 자유와 진리와 낭만을 꿈꾸던 관악의 철부지 새내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암흑의 시대'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기어이 첫 희생자를 내고 만다. 더 기막힌 것은 희생자가 전혀 뜻밖의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1975년 5월 22일 사회계열 1학년생 박원순은 평소와 다름없이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경남 창녕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경기고를 거쳐 사회계열에 입학한 그는 부모님의 기대대로 법대를 나와 판-검사의 길을 가려는 소박한 법학도였다. 학내 이념서클에도 관심이 없었고 가입한 서클도 없었다. 그런데 이날 도서관에서 뜻하지 않게 목격한 장면이 그의 인생뿐 아니라 한국 사회를 엄청나게 바꾸게 될 줄이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밖이 시끄러웠습니다. 내다보니 학생이 얼마 안 되는데 경찰에 둘러싸여 형편없이 당하고 있었어요.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이 분노해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만...."

긴급조치 9호에 처음 정면으로 도전한 이른바 '오둘둘 사건'이다. 당시 서울대 운동권 선배들은 1학년은 의식적으로 시위에 참여시키지 않고 보호했던 터라 박원순은 사전 모의에 가담할 리도, 시위를 주동할 리도 없었다. 단순 가담자로 남부경찰서로 연행된 그는 한 달간 유치장에 있다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다. 그로부터 두 달 뒤, 기소유예로 석방됐을 때 학교에서는 이미 제적돼 있었다.

졸지에 낭인 신세가 된 그는 인생의 좌표를 전면 수정한다. 그때 그냥 훈방시켜줬다면 지금쯤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돼 있을지도" 모를 그의 인생 역전(?)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그는 영등포구치소 경험과 그 뒤의 방랑생활을 반항과 좌절로 소모한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으로 삼았다.

"그때 왜 구속됐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된 거죠. 당시 만 20세가 안 돼 소년범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거기서 읽은 사회과학-문학 서적도 내게 매우 큰 감동과 영향을 주었어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이나 칼 메닝거의 [자살론], 헤르만 헤세의 [싯타르타] 등을 천착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또 이호웅 선배 등 '공범'들과의 만남도 내게는 소중한 인연이었죠."

박원순은 뒷날 인권변호사가 되어 이호웅(열린우리당 의원)-김정환(시인)-채광석(시인, 작고) 등 선배 공범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동기생 강금실과도 당시 남편이자 1년 선배 김태경(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대표)의 사건 변호인으로서 만나 우의가 깊어졌다. 그는 출소 후 방황한 기간도 학점에 얽매이지 않고 독서에 몰두할 수 있었던 만큼 '행복했던 나날들'로 기억했다.

하지만 기약없는 복적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역사공부를 하고 싶었던 참이라 예비고사를 다시 봐서 단국대 사학과에 새로 입학한다. 병역 문제를 피할 수 없어 고향에 내려가 방위병 근무를 한 것이라든가 법원 사무관시험에 합격해 강원도 정선에서 등기소장을 지낸 것도 남들이 하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이었다. 고향과 농촌의 현실에 새로이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일선 행정기관장의 고뇌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행운은 조영래 변호사(작고)와의 만남이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재학 중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복역하고 출소 후에도 장기 도피생활에 들어간다.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야 복권된 그는 1982년 사법연수원에서 박원순과 조우한다.

박원순은 이호웅의 권유로 검사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미 검사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1년을 못 버티고 사표를 내고는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인권 변론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조 변호사와 함께 변론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1980~90년대를 인권변호사로서 치열하게 보냈다. 1980년대 후반 인권변호사들의 비공개모임으로서 뒷날 민변의 토대가 됐던 정법회 활동에 몰두하면서도 그는 역사학도로서 미련 또한 버리지 않았다. 이호웅과 소설가 김성종, 원경 스님 등의 만류로 유학 대신 역사문제연구소 설립으로 방향을 틀기는 했지만 1990년 12월 조 변호사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영국행을 결행했다. 조 변호사가 죽기 전에 "돈은 그만 벌고 외국에 나가보라"고 한 권유를 실천에 옮긴 셈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보낸 2년의 기간은 참여연대 활동과 아름다운 가게 설립의 든든한 밑천이 됐다. 영국 LSE에서 로잘린 히긴스 교수(현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로부터 국제법을 배우면서 유럽 여행을 통해 인권-환경-복지 등 다양한 제도와 현실을 체득하고 나라와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델을 이해하게 됐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와이드너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수많은 자료를 모았다. 내부고발자 보호법-정부윤리법-돈세탁방지법-예산낭비 환수요청권 등 뒷날 참여연대가 제기한 수많은 이슈는 그의 '와이드너 보따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아름다운재단 설립 발상도 하버드대에서 가져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는 'Check Enclosed', 즉 후원금을 의미하는 수표 동봉"이라는 내용을 담은 법대 뉴스레터의 칼럼이었다.

관악 1세대 첫 희생자였던 박원순은 "절망하고 좌절할 만한 역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는 바람에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었던 게 내게는 전화위복이었다"며 "같은 맥락에서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어 할 일이 없는 세대가 오히려 불행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개혁에 맹목하고 개혁을 지체하면 그 사회는 치명적인 후퇴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조그만 일부터 실천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우리 세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박원순의 역경은 긴조9호 세대에는 고난의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들의 의도와 별도로 선배그룹에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학생운동의 전 역량이 투입될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동호 편집장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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