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개혁, 골든타임 놓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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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만에 재논의 국민연금개혁 또 공회전

이분법 넘어 합의점 찾아가는 연금정치 필요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종합상담실 /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종합상담실 / 연합뉴스

국회로 넘어간 연금개혁이 또다시 진통을 겪고 있다. 국민연금 공론화 조사에서 시민대표단이 택한 ‘더 내고 더 받는(소득보장 강화)’안을 두고 여야가 공회전을 벌이고 있다. 21대 국회가 한 달이 채 남지 않아 17년 만에 불붙은 개혁 논의가 또 좌초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공론화 과정에는 시민들이 토론을 벌이고 설문조사로 의견 변화를 살펴보는 숙의 토론을 통해 시민이 처음 참여했다. 또 논의 과정에서 시민들이 내는 보험료율을 인상하고 연금 의무가입 상한 연령을 올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시민대표단이 선택한 안에 대해 “미래세대 부담만 가중된다”며 사실상 반대했다. 취임 초 3대 개혁 중 하나로 연금개혁을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4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영수회담에서 “연금개혁을 차기 국회로 넘기자”고 말했다. 이후 국정과제 이행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정부가 되려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시민사회 단체 간 의견 충돌도 이어지고 있다. 연금의 재정 안정성을 중시하는 학자들이 모인 단체인 연금연구회는 지난 5월 2일 입장문을 내고 “그냥 현 제도를 유지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시민대표단이 선택한 개혁안이 연금개혁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306개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연금행동은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고 “제도 개선이 없다면 (올해) 다섯 살인 2020년생이 국민연금을 받는 2085년에도 노인빈곤율은 30%에 육박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악의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며 “소득대체율을 지금처럼 탈빈곤이 불가능한 낮은 수준에 두면 (이들을 부양해야 할) 미래세대의 부담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맞섰다.

국민연금개혁, 골든타임 놓칠라

■ 시민대표단,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안 선택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공론화위원회에 따르면 시민대표단은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고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현행 40%에서 50%로 늘리는 소득보장 강화안(1안)을 택했다. 위원회는 1안과 내는 돈을 12%로 올리고 받는 돈은 현행 40%를 유지하는 재정안정 강화안(2안)을 놓고 3개월간 전문가, 이해관계자, 시민대표단 숙의·토론을 거쳤다.

그 결과 시민대표단이 최종설문을 통해 1안(56.0%)을 꼽아, 공론화위는 다수안인 1안을 국회 특위에 지난 4월 30일 보고했다. 두 가지 안 모두 현행 59세인 국민연금 의무가입 상한 연령을 연금 받는 시점에 맞춰 64세로 연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어느 안을 택하든 보험료율은 오르고 보험료를 내는 기간도 5년 연장된다.

국민연금개혁, 골든타임 놓칠라

기금 소진 예상 연도는 1안이 2061년 2안이 2062년으로 추산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지금과 같은 수준의 연금을 기금 없이 보험료로만 지급하려면, 기금 고갈 이후 미래세대는 월 소득의 35%가량을 보험료로 낼 것으로 추산됐다. 현 수준의 연금 소득대체율(40%)을 유지하려면 이전 세대가 9%만 내던 보험료를 4배가량 더 내야 하는 셈이다. 소득대체율은 ‘연금 가입기간 평균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을 뜻한다. 또 재정수지 부문에서도 향후 70년간 1안은 누적 적자를 702조원 늘리고, 2안은 1970조원가량 줄일 수 있을 만큼 격차가 컸다.

시민대표단은 ‘더 내고 더 받기’를 선택했다. 학습과 토론을 거치면서 기금 고갈에 대한 우려가 줄고 소득보장 강화안으로 기울었다. 향후 인구 구성과 재정 추계 등을 토대로 적절한 개혁을 하면 연기금의 건전성을 관리해갈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예측한 것이다. 소득보장 측을 대변하는 전문가 집단은 토론회에서 “연금에 국고를 지원해 국가가 재정 부담을 덜어주는 등으로 적극적으로 고령화에 대응한다면 기금이 소진되거나 심하게 적자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아우르는 구조개혁에 대해선 제도를 유지하자는 답변도 시민대표단의 52.3%로 절반을 넘었다. 기초연금이 국민연금의 낮은 보장성 때문에 도입된 만큼 노인 빈곤 문제 등을 고려해 2개 연금이 각각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대표단의 숙의 결과가 국회로 넘어간 뒤 국회 연금특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첨예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여당 의원들은 “더 내고 더 받는 안은 미래세대가 감당할 수 없는 방안”이라며 반대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1안에 따르면 지금 태어난 친구들은 마흔 살이 되면 본인 소득의 약 43%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며 “10세 이하 국민의 의견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했다.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세대 간 보험료율’, ‘수지균형 보험료율’ 등의 정보를 시민대표단 자료집에 넣었다가 삭제한 후 다시 배포한 것 등 공론화 절차가 정당하지 않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반면 민주당과 정의당은 공론화 과정과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당 의원들의 지적은 이번 안 이후 추가 연금개혁이 없다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리가 없진 않다. 다만 시민 숙의 과정을 거쳐 채택한 안을 반대할 것이라면, 왜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론화 과정을 거쳤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4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주호영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주호영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와 여당이 재정안정을 강화하는 안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면 애초에 해당 안으로 추진했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아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논란에 윤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 없이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했다. 사실상 국회도 전문가들의 논의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애초 개혁안조차 내놓지 않은 당정이 시민들이 숙의를 통해 결정한 선택지를 거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공론화 결과는 시민들의 정책 권고 사항으로 그대로 추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국회 특위는 더 나은 대안 모색을 위해 시민단이 뽑은 안을 택해 추후 개혁안을 마련하거나, 소득보장안에 재정안정 방안을 보완한 절충안을 만드는 등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면 된다.

다만 단일안을 도출하기 위해선 정부와 여야가 검토해야 할 사안이 있다. 재정안정 측을 대변하는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국회는 시민들의 숙의 안을 존중하되 입법기구인 만큼 심의과정에서 반드시 사실 확인이 진행돼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오 위원장은 “연금에 대한 국고 지원 여력과 연금에 쓰는 것에 대한 적절성, 소득대체율 인상이 노인 빈곤 개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을 해야 한다”며 “재정 수지 분석에서도 (소득보장 측이 주장한 대로) 1990년대생이 보험료를 내는 만큼 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사실 확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개혁안 제시 못 한 당정, 시민 숙의는 무시

1988년 첫발을 뗀 국민연금은 두 차례 개혁을 거쳤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낮추고, 수급개시연령을 기존 60세에서 2033년까지 65세로 단계적 상향하는 것을 골자로 1차 개혁을 했다. 2003년 제1차 재정계산에서 국민연금 기금이 2047년에 고갈된다는 전망이 나오자 노무현 정부는 2007년 2차 연금개혁을 단행했다. 보험료율은 그대로 두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장기적으로 40%까지 낮추기로 했다. 모두 기금 고갈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현 추세로라면 1990년생이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2055년에 기금이 소진된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낸 보험료의 2배 이상을 연금으로 지급해 기금 고갈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들어온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줘야 하는 만큼 기금이 소진되는 건 시간문제다.

기금이 바닥나도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는 일은 국가가 있는 한 발생하지 않지만, 재원을 충당하는 방식은 고민해야 한다. 현재 국민연금은 부과식과 적립식이 섞인 ‘부분 적립식’으로 운용된다. 급여 일부분은 적립하고 일부분은 연금 급여로 지출한다. 이로 인해 근로 세대가 은퇴 세대를 부양하는 ‘세대 간 연대’ 구조가 만들어진다. 연금개혁은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올려 국민연금 기금 소진 시점을 미루고 노인인구 폭증기에 개인과 사회적 부담을 줄이는 것이 목표다.

국회 연금특별위원회가 공론화에 이르기까지 2년 가량 걸렸는데, 이번 국회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면 연금개혁은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로 또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국민연금개혁이 1년 늦춰질 때마다 50조원의 국가 재정이 필요하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우려도 나왔다. 연금개혁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는 만큼 단일 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최소한 합의가 가능한 부분부터 소폭의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21대 국회에서 3차 개혁이 이뤄진다면 26년 만에 보험료율이 올라가게 된다. 21대 국회는 올해 5월 29일에 문을 닫는다.

지난 2월 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받은  김근태 국민의힘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받은 김근태 국민의힘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재철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강사(전 공무원연금개혁 국민대타협기구 위원)는 “17년간 반복된 이분법적 논의 구조는 세대 간 갈등과 연금에 대한 불신을 키워 연금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리고 있다”며 “보험료율 인상 등 합의 가능한 접점을 찾아 미흡한 개혁이라도 일단 시작하고 추후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소득보장’도 ‘재정안정’도 다 잃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이런 갈등 구조가 반복될수록 타 국가보다 연금 보험료를 절반 수준만 내는 사업주가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된다”며 “일본은 연금개혁 추진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법이 있어 여야 간 정쟁이 생겨도 계속 개혁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도 타협이 가능한 부분부터 찾아 연금 정치를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국민연금 보험료율(9%)로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2020년 기준 독일의 보험료율은 18.6%, 스웨덴 22.3%, 일본 18.3%, OECD 평균 18.2%다.

■ 이분법 논의 연금 불신·세대 간 갈등 키워

국회와 시민단체가 공회전을 거듭하는 사이 20·30세대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연금개혁을 위한 제3의 안건을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안으로 제시돼 급부상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의 젊은 정치인들이 국민연금을 구연금·신연금으로 완전히 분리하는 신설안을 바탕으로 개혁 논의를 하자고 나섰다.

김근태 국민의힘 의원(비례대표)은 지난 5월 1일 국회 회견을 통해 “연금 구조개혁은 기성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짐을 미래세대에 전가해선 안 된다는 상식과 공정의 문제”라며 “재정안정안이든, 소득보장안이든 보험료율 인상으로 재정 건전성을 일시적으로 확보할 수는 있지만, 향후 목표 소득대체율을 확보하기 위해선 언젠가 보험료율을 큰 폭으로 다시 올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김 의원은 KDI가 제안한 ‘신 연금’ 분리 신설안을 연금특위에서 논의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준석 대표와 천하람 당선인 등이 주축이 된 개혁신당도 이런 개혁안을 지지하고 있다. KDI는 지난 2월 이미 연금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구연금’과 그렇지 않은 미래세대를 위한 ‘신연금’을 분리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신연금은 가입자가 낸 보험료만큼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 기존 세대에 약속한 지급분이 담긴 ‘구연금’에 대해선 일반재정을 투입해 미적립 충당금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안을 따르면 구연금 재정 부족분의 현재가치는 올해 기준 609조원 내외로 추정돼 이를 메울 정책이 마땅히 없다. 또 신연금을 받는 세대의 연금액이 매우 낮아질 수 있어 연금 학자들도 반대하고 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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