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 극지 개발이 미래 먹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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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보고로 중요성 커져…정부, 연구개발비 오히려 삭감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극지연구소 제공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극지연구소 제공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寶庫)’, ‘기후변화의 최전선’, ‘인류 생존의 열쇠를 품은 공간’….

남극과 북극 등 극지의 가치와 중요도를 강조할 때 흔히 쓰는 표현들이다. 극지는 국가 차원의 투자와 노력에 따라 미래 극한 기술을 개발하고 선점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동시에 세계 각국의 기술 패권 확보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한국도 오래전부터 잠재적 미래가치가 풍부한 극지 연구개발(R&D)에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내년도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연구개발 활동이 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정부 삭감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극지 연구개발 예산, 얼마나 깎였나

내년도 극지 연구개발 예산은 당초 정부 계획 대비 70% 가까이 삭감됐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월 11일 과기정통부와 해양수산부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극지 연구 중기재정 계획 및 2024년도 예산안’을 보면, 당초 1058억원으로 계획됐던 내년 극지 연구개발 예산은 최근 정부 부처 조정을 거친 후 710억원(67%)이 삭감돼 348억원으로 줄었다. 올해 예산(691억원)과 비교해도 절반(49.6%) 수준에 그친다.

주요 항목별로 보면, 극지 생물에서 항생제나 치매 치료제 후보 물질을 찾아내 실용화까지 추진하는 ‘극지 유전자원 활용기술 연구개발’ 사업이 당초 61억원에서 4억원으로 57억원이 삭감됐다. 극지연구소가 단독으로 입찰에 응했다는 이유에서 93%를 깎은 것이다. 해수부는 예산 삭감 관련 보도가 나온 직후 배포한 설명자료에서 “비효율적 요소를 줄이고 투자를 강화한 차원”이라며 “극지연구소는 극지의 유용한 물질을 확보하고 그 기능을 규명하되, 실용화 단계는 전문성 있는 유관기관에서 추진하도록 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소는 극지에서 확보한 자원을 활용해 치매 치료 효과가 있는 후보물질을 탐색하는 역할만 하고, 독성 실험과 생산공정 확보 등 실용화 추진은 유관 전문기관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논리다.

극지 연구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찬대 의원실에 따르면 해당 사업은 2020년 2차 재공고까지 진행됐음에도 전문성과 접근성 측면에서 문턱이 높아 어떠한 기관도 신청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 극지 연구를 유일하게 수행할 수 있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가 단독 선정됐다. 박찬대 의원실 관계자는 “극지 연구활동은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을 기본으로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이번에 삭감된) 극지 유전자원 활용기술 연구개발 사업의 경우, 극지연구소는 2021년부터 국비를 지원받아 극지에서 연구활동을 진행했고 실용화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연구개발을 진행한 국내 연구소가 최종적으로 실용화 결실을 보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도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삭감 조치는 상당히 아쉬운 결정”이라고 말했다.

세종과학기지 전경 / 극지연구소 제공

세종과학기지 전경 / 극지연구소 제공

장보고과학기지 전경 / 극지연구소 제공

장보고과학기지 전경 / 극지연구소 제공

내년 741억원으로 계획된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 사업은 정부안에서 560억원이 삭감돼 181억원으로 편성됐다. 2번째 쇄빙연구선을 만드는 것이 골자인 이 사업은 2027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북극점을 포함한 북극해 국제공동연구를 주도하기 위해 계획됐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제1차 극지 활동 진흥 기본계획’에서 2774억원을 투입해 2026년까지 1만5000t급 차세대 쇄빙연구선을 건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본계획은 남극과 북극 등에서의 과학연구, 경제활동, 국제협력, 인력양성 등 극지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첫 법정 기본계획이다. 조승환 해양수산부 장관은 당시 기본계획을 발표한 자리에서 “기본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해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새로운 첨단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 나설 것”이라며 “대한민국이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극지 활동의 세계적 선도국가로 자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현재 보유 중인 한국 최초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6950t급)로는 얼음이 두꺼운 고위도 북극해까지 진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그러나 1.5m 두께의 얼음을 3노트(5.6㎞/h)의 속도로 깰 수 있어 아라온호가 진입하기 어려웠던 북위 80도 이상의 북극해까지 운항할 수 있다.

해수부는 예산을 삭감한 것이 아니고 연차 투입 계획을 조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찬대 의원실 관계자는 “쇄빙선 건조 계획을 밝힌 지 1년도 안 돼 편성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은 사실상 사업의 백지화를 의미한다”며 “해수부 주장대로 예산을 삭감한 것이 아니고 연간 투입 계획을 조정했다고 해도 사업 차질은 불가피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극지 연구개발이 중요한 이유

극지 기후변화는 전 세계 이상기후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북극의 찬 공기를 막고 있던 제트기류가 약해져 폭염과 한파가 극심했던 지난 2018년, 한반도는 사상 최장의 여름철 폭염일수(39.3일·평년 14일)를 기록했다. 남극 빙하가 전부 녹았을 때 전 지구 해수면이 약 58m 상승해 한국의 서울이 침수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과거 기후 변천사를 확인하는 일도 극지에서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빙하와 해양퇴적물에 담긴 온실기체, 미생물 등의 과거 기록을 통해 수천, 수만년 이전의 기후변화를 분석·확인할 수 있다.

극지가 품은 자원량은 방대하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많은 어종이 이미 서식처를 북쪽으로 옮기고 있다. 2050년에는 북극해 주변 어획량이 전 세계의 39%를 차지할 정도로 늘고, 어종도 2.5배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해수부는 현재 전 세계 미발견 천연가스 30%와 가스하이드레이트(불타는 얼음) 20%, 석유 13%가 북극해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북극항로 선점 여부도 중요하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바다얼음이 녹아 이전에 없던 북극항로가 새로 만들어지는 경우다. 해수부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동항로(NSR) 이용 시 한국에서 유럽까지 운항일수가 최대 15일 단축(7000㎞)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주요국은 극지를 선점하기 위해 과학연구와 기술 개발 투자를 늘리고 있다. 현재 남극에 기지를 둔 국가는 모두 30개국이다. 주요국 중 미국은 연간 평균 5000억원을 남극 연구개발 활동에 투입한다. 중국은 극지 연구를 국가 7대 전략 과학기술로 선정하고, 매년 7% 이상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한국은 1986년 남극의 평화적 목적 사용 등을 골자로 한 남극조약 가입을 기점으로 극지 연구개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1988년 2월 세계에서 18번째이자 한국 최초의 남극기지인 세종과학기지를 서남극 킹조지섬에 건설하면서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했다. 2002년 4월엔 노르웨이 스발바르 군도 니알슨(북위 78도)에 북극 현지 연구소인 다산과학기지를 건립했고, 2009년 11월엔 헬기와 바지선, 각종 장비 등을 탑재하고 항해할 수 있는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건조했다. 2013년 5월엔 북극 개발을 주도하는 북극이사회의 정식 옵서버 자격을 획득해 북극 개발과 관련된 북극이사회의 정책 결정 과정에 우리 입장을 반영할 수 있게 했다. 2014년 2월엔 동남극 테라노바만에 제2기지인 장보고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제도 정비도 진행됐다. 2021년 10월 극지에서의 과학연구와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극지활동진흥법’이 시행됐다. 이 법에 따라 해수부는 5년마다 극지 활동 기본 방향과 연구 목표, 재원 확보 등의 내용을 담은 ‘극지 활동 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행계획을 매년 마련해 수행한다.

이러한 노력 덕에 거둔 성과들이 많다. 2014년 9월 북극 해빙 감소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 기후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혀냈다. 또 2020년 2월 남극 빙하의 (얼음이 녹는) 용융 현상을 늦추는 빙붕의 역할을 규명했다. 남극대륙은 수백m 두께의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빙붕이 따뜻한 바닷물의 남극 유입을 막아 남극 빙하가 녹아내리는 현상을 늦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극지 연구개발 예산 삭감은 단순히 관련 사업이 차질을 빚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국제사회에서 신뢰도 하락과 위상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극지 연구개발에 참여해온 한 관계자는 “극지는 각국이 사활을 걸고 연구개발 경쟁을 벌이는 곳이자,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협력하며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 예산 삭감으로 연구개발 경쟁력이 저하되면 국가적 신뢰와 위상이 떨어질 수 있다. 예산을 줄일 게 아니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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