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전 세계 배달 라이더들 ‘분노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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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리 배달 라이더가 파업할 수 없을 거라 말하죠. 건당 배달비를 받는 경쟁 때문에 힘을 모을 수 없을 거라고요. 우리 말고도 여러분 집으로 배달을 해줄 배달원들이 많이 있으니까, 회사는 우리가 결국 지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우리 대답은 이겁니다. 아니오(No)!”

배달노동자들이 지난 4월 25일 서울 송파구 배달의민족 본사 앞에서 내비게이션 실거리 요금제 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배달노동자들이 지난 4월 25일 서울 송파구 배달의민족 본사 앞에서 내비게이션 실거리 요금제 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올해가 시작된 1월, 플랫폼 노동자 투쟁의 첫 포문을 연 것은 영국 배달 라이더였다. 놀랍게도 이들의 파업은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돼 반년 넘게 지속됐다. 배달 플랫폼 ‘저스트이트’, 이들의 배달을 대행해온 ‘스튜어트’가 기본 배달단가를 무려 24%나 삭감해 버리자 이에 분노한 라이더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2월은 튀르키예, 3월은 미얀마, 4월 포르투갈, 5월 아랍에미리트(두바이), 6월 네덜란드, 7월 독일, 8월 말레이시아, 9월 프랑스, 10월은 이탈리아·한국·태국·홍콩에서 배달 라이더들의 파업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우버’를 비롯한 앱 택시기사들도 남아공(8월), 케냐(10월) 등에서 파업을 조직한 바 있지만, 올해의 경우 플랫폼 노동자들 저항의 핵심부대는 배달 라이더였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배달 수요와 라이더 규모가 폭증했다가, 엔데믹과 함께 배달료 후려치기를 비롯한 노동조건 악화가 시작된 것이 주된 원인이 됐다. 감염병 공포 시기에는 ‘필수노동자’라며 추켜세웠지만, 그 기간이 지나가자 일회용 소모품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파업과 저항의 핵심 요구에는 항상 삭감된 배달료 원상회복 또는 배달료 인상이 포함돼 있다.

특히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튀르키예의 경우 지난 2월부터 수도 이스탄불에서 배달 플랫폼 ‘예멕세페티’ 라이더들의 파업이 1주일 이상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라이더유니온과 배달플랫폼노조가 ‘쿠팡이츠’의 배달료 삭감 이후 20여차례 교섭했지만 개선되지 않아 지난 10월 두 차례 파업을 벌였다.

알고리즘 이슈도 뜨거운 쟁점

홍콩의 ‘푸드판다’ 배달 라이더들이 10월부터 최근까지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부정확한 배달거리 계산 맵을 개선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최근 새로 적용한 맵으로 배달을 해봤더니 배달료가 오히려 삭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 아닌가. 그렇다. 한국에서도 ‘배달의민족’이 자체 개발한 앱을 사용해 배달거리를 줄이는 방식으로 알고리즘을 조작해 배달료를 삭감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라이더유니온으로부터 고발도 당하고 배달플랫폼노조의 항의가 이어지자 상용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푸드판다는 미얀마와 말레이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을 벌여 각각 3월과 8월에 라이더들이 파업을 조직한 바 있다. 배달료를 직접 삭감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알고리즘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라이더 저항을 주도하고 있는 노동조합들은 모두 노동조건을 좌우하는 배차·가격 결정 알고리즘 등을 투명하게 설명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 노동조합 CCOO는 지난달 ‘글로보’ 배달 플랫폼에 알고리즘 설명 요구를 공식 전달하기도 했다. 지난해 만들어진 스페인 라이더법에 의하면 회사는 요청을 받은 지 15일 이내에 정식 답변을 내놔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푸드판다와 배달의민족, 글로보 모두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의 자회사라는 점이다. 즉 배달의민족에서 벌어진 일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자회사를 통해 동시에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할 말 있습니다](19)전 세계 배달 라이더들 ‘분노의 질주’

10월 5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글로보 배달 라이더들이 24시간 파업을 벌였다. 전날 사고로 세바스티앙 갈라시라는 26세의 청년 배달 라이더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글로보가 고인에게 “유감스럽지만 계약조건에 명시된 업무를 수행하지 않아 귀하의 계정은 정지됐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죽어서도, 지옥에 가서 앱 열고 배달하란 말인가. 이탈리아 4개 총연맹 소속 라이더들이 모두 파업에 돌입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8월에는 그리스 노동부 앞에서 배달 라이더노조가 ‘E-푸드’ 산재사고 증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교대조 근무가 끝날 즈음에 사고가 집중되며, 제공받는 헬멧이 부실해 머리를 많이 다치고 있는데 회사가 아무런 대책도 수립하지 않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라이더들은 E-푸드의 “쉬지 않는 배달”, “시한폭탄처럼 카운트다운을 요구하는 배달”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한 조건에서 배달에 나서기에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날 노동조합은 ▲노동부의 공식 조사와 근로감독 ▲‘위험직업 보험’을 모든 라이더에게 제공할 것 등을 요구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E-푸드 역시 딜리버리히어로의 자회사다.

11월 1일에는 필리핀 라이더그룹이 촛불집회를 열었다. ‘라라무브’ 배달 플랫폼으로 일하던 라이더 한명이 배달 콜을 기다리던 중 잠시 눈을 붙이다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일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배달료 삭감⇒노동조건 악화⇒잦은 사고

세계 곳곳에서 배달료 삭감에 나선 배달 플랫폼들은 라이더들의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심지어 태국에서는 라이더들이 콜을 거절하면 8바트의 돈을 플랫폼에 지불해야 하는 황당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항의파업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배달료 삭감은 결국 라이더들이 생활임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배달 일감을 더 빠른 속도로 쳐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럴수록 라이더들의 안전은 위험해진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다. 악순환은 플랫폼 노동의 조직화와 저항으로, 플랫폼 규제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AB5법, 스페인 라이더법, 유럽연합의 플랫폼 노동 관련 입법지침 등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에 공통적으로 녹아 있는 원칙이 있다. 이들 기업을 규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보장하고 단체협약을 통해 플랫폼 기업의 탐욕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 이런 원칙을 입법으로 만든 그들이 ‘플랫폼 자율규제’라는 형용모순 단어를 듣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解放)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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