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입에서 재등장한 ‘집단학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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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지역에서 집단학살(genocide)을 저지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반도 강제합병 이후 8년 만에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푸틴 대통령이 ‘집단학살’ 표현을 재활용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침공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월 21일(현지시간) 대국민 TV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고, 해당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월 21일(현지시간) 대국민 TV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고, 해당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 AP연합뉴스

푸틴 “우크라이나는 학살 주동자”

푸틴 대통령은 지난 2월 15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지금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집단학살”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푸틴 대통령의 ‘집단학살’ 발언은 러시아 고위관리들과 관영매체를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뱌체슬라프 볼로딘 러시아 하원(국가두마) 의장은 지난 2월 18일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군이 돈바스 지역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저질러왔음을 은폐하려 한다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 올렸다. 같은 날 러시아 외교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민간인들을 멸종시키고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배포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2월 21일 대국민 TV연설에서 “자칭 문명화된 세계는 현재 400만명을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다시 한 번 돈바스 지역에서 시민들이 집단학살로 고통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집단학살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집단학살이란 ‘특정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집단학살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무고한 시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이유로 침공할 명분을 얻으려 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2014년 5월 23일(현지시간) 친러 보스토크 대대 대원들이 이른 아침 우크라이나군과 충돌을 빚은 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의 피스키 마을에 모여 있다. / 게티이미지

2014년 5월 23일(현지시간) 친러 보스토크 대대 대원들이 이른 아침 우크라이나군과 충돌을 빚은 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의 피스키 마을에 모여 있다. / 게티이미지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강제합병과 뒤이은 돈바스 지역 침공 때도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운 바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채널1 등 러시아 국영방송이 퍼뜨렸던 ‘슬라뱐스크 소년’ 가짜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군이 친러 무장세력으로부터 동부지역 슬라뱐스크를 탈환한 뒤 세 살짜리 소년을 어머니 앞에서 공개 처형하는 등 러시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잔학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보도 내용이 현지 증언과 일치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실제 목격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밝혀졌다.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가짜뉴스는 당시 러시아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우크라이나 공격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됐다.

일각에선 푸틴 대통령이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을 통해 서방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러시아가 구소련 지역 러시아 주민들의 정당한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한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은 적대적인 서방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러시아가 구소련 지역 러시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모스크바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면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려는 모든 시도는 러시아 민족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참모였던 세르게이 글라지예프 역시 ‘집단학살’ 주장을 통해 서방세력이 러시아를 망친 주범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온 인물이다. 그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러시아에서 행해진 급진적인 경제개혁으로 경제시스템이 파괴된 것을 일종의 집단학살이라 보았다. 집단학살은 실질적인 물리적 폭력뿐만이 아니라 한 민족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에 개혁가들이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집단학살을 자행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글라지예프는 개혁가들의 진짜 동기는 “러시아와 러시아 문화를 증오하고, 러시아 문명을 무너뜨리려는 욕망”이었다며 그 기원은 서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4년 탈러시아 성격의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센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34년 우크라이나인들이 대량 아사한 ‘홀로도모르’가 스탈린 정권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며 이를 집단학살 범죄로 규정하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기아에 의한 죽음’ 또는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이다. / 게티이미지

지난 2004년 탈러시아 성격의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센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34년 우크라이나인들이 대량 아사한 ‘홀로도모르’가 스탈린 정권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며 이를 집단학살 범죄로 규정하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기아에 의한 죽음’ 또는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이다. / 게티이미지

집단학살 주장은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신생국들에서 집권 세력이 집권을 정당화하거나 적을 공격하는 논리로 사용하기도 했다. 앞서 2004년 탈러시아 성격의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30년대 스탈린 정권 하에 200만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대량 아사한 ‘홀로도모르’ 사태를 집단학살 범죄로 규정하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구소련 국가였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둘러싸고 자존심 대결을 펼치면서 둘 다 상대측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주민의 대다수가 아르메니아계라 두 국가가 영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조지아 내 자치 공화국이었던 남오세티야·압하지야도 2008년 분리독립 선언 후 조지아와 집단학살 범죄의 책임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에브게니 핀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국가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구성원들이 부당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단학살’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집단학살’ 가짜뉴스, 이번에도 통할까

우크라이나가 집단학살을 저지르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여론전이 크림반도 합병 때처럼 이번에도 러시아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킬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12월 러시아 현지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 첸트르가 실시한 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한 이들은 응답자의 43%를 차지했다. 2014년 11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우크라이나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답한 것과 견줘 크게 줄었다. ‘우크라이나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7년 전보다 16%포인트 늘어나 전체 응답자의 45%를 기록했다.

<김혜리 국제부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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