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한류로 번성했지만 코로나로 쇠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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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은 서울에서 땅값과 임대료가 가장 비싼 곳으로 꼽힌다. 가장 번화하고 화려하며 최근까지 국내외 인파가 몰리던 곳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터지고 급격히 변한 곳을 들라면 단연 명동을 꼽을 수 있다. 곳곳에 관광객과 유람객으로 붐비던 골목과 가게는 모두가 버리고 떠나버린 도시의 모습으로 보였다.

명동의 모습은 사람이 버리고 간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명동의 모습은 사람이 버리고 간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을 나와 북쪽으로 뻗어 을지로까지 통하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명동의 중심 골목이다. 화려하게 들어섰던 유명 상점들이 하나같이 철수해 빈 가게에 붙은 임대표지만이 눈에 띈다. 유리문 안으로 고지서와 급전 알선 광고들이 가득 쌓여 문을 닫은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골목 안 상점의 열에 일곱은 문을 닫았다. 유명 스포츠 의류매장이 건재한 채 있는데, 들고 나는 손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명동은 한류 때문에 엄청 번성했다가, 코로나로 망했다”는 것이 약국 주인의 이야기다. 예전에도 패션과 미용, 유행과 유통의 중심이었지만 최근 20년 이상 불어온 한류 열풍으로 명동은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약국 주인은 “성형외과와 피부과 처방전이 매출의 절반이 넘었는데, 지금은 인근 상가에서 철거 작업하는 인부들 파스가 제일 많이 팔린다”는 푸념도 곁들였다. 골목 군데군데 트럭이 서 있고 내부를 뜯는 철거 공사 현장이 흔하게 보인다. 명동은 철시 중이다.

코로나19 이후, 명동은 철시 중

19세기 말 명동성당이 들어서면서 중국대사관이 들어오고 청국인 거주지가 됐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주된 상업지역이 되면서 명동시대의 막이 열렸다. 일본인은 이곳에 혼마치(本町)란 이름을 붙였는데,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조선인 상권 명동일대는 일본인 상권이라는 암묵적인 선이 그어졌다. 명동이 본격적으로 커지고 시대의 중심이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피란에서 돌아와 명동 중심으로 금융과 상업지대가 자리 잡았다. 지금의 명동예술극장 자리에 있던 국립극장 인근에 문화예술인도 진을 치고 있었다. 명동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

유네스코 회관 건너편 골목길 초입에 돌로 새긴 표석이 있다.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 예술인과 명동 이야기가 나올 때면 빠지지 않는 막걸릿집 은성이 있던 자리다.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하던 막걸릿집은 인심이 후해 누구라도 외상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걸리로 요기와 취기를 겸할 수 있었기에 세상에서 탈락하지 않으려 모진 애를 썼던 예술인들이 구김 없이 드나들 수 있었던 곳이다.

국내 최고 임대료를 자랑하는 매장도 손님의 발길이 없다.

국내 최고 임대료를 자랑하는 매장도 손님의 발길이 없다.

은성을 거쳐간 인물과 당시의 사건은 수많은 후일담을 만들어냈다. 명동백작 이봉구를 중심으로 시인 김수영과 김관식 하며 박인환과 전혜린 등이 은성을 드나들었다. 이봉구의 별명인 명동백작은 문학과는 상관없이 박노식 주연의 활극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한동안 명동의 건달을 그린 액션영화가 줄을 이었다. 지금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길 한편 지하에 명동백작이란 주점이 있고, 가파른 계단 너머 영화 <명동백작 명동에 나타나다>의 빛바랜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은성뿐 아니라 명동 곳곳의 다방은 문인들이 글을 쓰거나 외상 커피를 마시며 죽치는 공간으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다방은 그들로부터 받지 못한 커피값이 쌓이고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다. 현대문학 구성원들이 주로 진을 치던 문예살롱과 연극인 등이 드나들던 동방살롱 2곳이 유명했다. 그 밖에도 남대문로에서 국립극장을 거쳐 명동성당으로 이르는 긴 골목 주변에 있던 갈채, 모나리자 등이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김팔봉, 이봉구, 조연현, 조지훈, 천상병, 구상, 김동리, 서정주, 황순원, 계용묵, 신석초, 오상원 등 유명 문인들을 골목과 다방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었다. 작가들은 골목을 명동 산맥이라 표현하고 다방은 토끼굴, 술집은 옹달샘이란 은어로 불렀다.

문화예술인들의 시대였던 50~60년대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교육방송(EBS) 제작 장편 드라마 <명동백작>은 그 시절 명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 정하연은 대학시절 명동을 드나들며 문학을 꿈꿨던 터라 생생히 당시 모습을 그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명동은 문학의 시대였다.

외국인 관광객 뿐 아니라 내국인의 발걸음도 끊겼다.

외국인 관광객 뿐 아니라 내국인의 발걸음도 끊겼다.

일본인이 들어서기 전 명동 일대가 중국인의 거리였던 흔적은 중국대사관과 한성 소학교에 남아 있다.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 중국대사관은 지금의 타이완, 자유중국으로 불렸던 중화민국 대사관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이 퇴장하면서 그 자리를 중국대사관이 차지했으나 자유중국의 흔적은 아직도 골목 곳곳에 남아 있다. 카페로 바뀐 고풍의 옛 화교 회관 건물 복판엔 아직도 자유중국을 상징하는 푸른 바탕 흰 태양의 청천백일 문양이 살아서 골목 넘어 중국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당 계열의 화교들이 돈을 모아 세운 도서관 건물은 유명 중국음식점들이 들어서 있어 미식가들의 순례지가 됐다. 그 아래 소학교 학생들에게 문구와 책을 파는 서점이 있다. 주인에게 근황을 묻자 “학생이 줄어 한류 상품 중심으로 바꿔봤는데 이젠 그나마도 안 될 일이다. 길이 열려야 살길도 생길 것 같다”라고 답한다. 책방 두곳 중 한곳은 아예 업종을 바꿨다. 그 옆 오향장육과 물만두로 이름난 중국집도 문을 닫았다. 대사관 앞 이름 높던 원조 중국요리 골목이 스산해졌다. 한성화교소학교 담을 따라 줄줄이 붙어 있던 노점은 말끔히 사라졌다. 국공내전 시절 산동성에서 건너왔다는 연로한 주인에게 엽차며 호랑이 연고 따위를 샀던 기억은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

명동엔 화려한 상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동 길 사이사이에 샛골목이 숨어 있고 나름대로 명성을 쌓은 식당도 있다. 길 건너에서 이사와 명동에 터를 잡은 곰탕집은 문을 연 지 70년이 됐다 하나 여전히 유명하다. 그 앞으로 샛골목이 있는데 이곳엔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 끓인 김치찌갯집이 여럿 숨어 있다. 불황을 모를 듯 번성하던 모습은 가게 간판에 쌓인 먼지처럼 허망한 꼴이 됐다. 종업원에게 어떠냐 묻자 “근근이 문은 안 닫고 있는데, 한계가 온 것 같다”고 답했다.

은성이 있던 자리 윗길에도 골목 안 찌갯집들이 숨어 있다. 오징어나 해산물 등을 넣어 끓인 섞어찌개가 일품인 집이 여럿 있는데, 한가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명동교자 옆 사이 골목의 삼겹살집과 찌갯집은 점심시간에도 손님을 볼 수 없었다. “아예 사람이 안 보여요”라는 이야기가 실감 난다.

명동 전체 상권이 철시한 상태다.

명동 전체 상권이 철시한 상태다.

길을 걷기 힘들 만큼 빽빽하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졌다. 비단 중국과 일본, 동남아 각지에서 오던 관광객만 발이 끊긴 것이 아니라 국내 유람객도 자취를 감췄다. 명동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뒷골목에 철물과 잡화를 파는 오래된 가게가 있다. 그 안주인은 “아마도 명동이 생긴 이래 지금 같은 때는 없는 것 같다. 전쟁 때도 지금 보다 나았다고 한다”고 한숨을 쉰다.

명동성당 담을 따라 계성여고 뒷문이 있는 골목에 가톨릭 전진상회관이 있다. 명동은 문학의 시대가 끝난 후 70년대 정치의 소용돌이가 닥쳤는데, 전진상회관과 명동성당이 유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중심지가 됐다. 함석헌은 만년까지 전진상회관에서 기독교 사상과 노자 등의 고전 강의를 했었다. 10·26사태 이후 삼엄한 계엄 치하 윤보선과 함석헌 등을 중심으로 대통령 간선제에 반대했던 YWCA 회관 위장결혼식 사건은 명동이 또 한차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계기가 됐다. 6월항쟁 기록 영상을 보면 명동 거리에 와이셔츠를 걷고 구호를 외치는 인근 직장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살짝 비킨 샛골목 안에 지금은 떠난 향린교회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소였다. 민주화 열기가 높던 때 명동의 길목과 골목은 그 화로의 불길을 태우던 현장이 됐다.

향린교회 골목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80년대 젊은이들이 몰려 밤을 불태우던 ‘제3지대’ 등의 나이트클럽은 사라진 지 오래다. 명동 입구를 지키던 중앙극장도 오래전 폐업했다. 무엇을 해도 활황을 누리지 못했던 코스모스 백화점 자리에 쇼핑몰과 극장 체인이 들어왔다.

관광기념품 가게들이 특히 타격을 입었다.

관광기념품 가게들이 특히 타격을 입었다.

“전쟁 때도 지금보다 나았다”

전진상회관 뒷골목에는 오래된 흥미로운 가게들이 살아 있다. 골목 안 냉면집은 보기보다 오랜 연륜으로 건재하고, 식탁 서너개를 두고 라면과 백반을 파는 작은 밥집은 가게문 연 지 반백년은 넘었다고 한다. 근처 직장인들이 소리소문없이 드나드는 숨은 곳이라 힘겨운 시절에도 문을 열 여력이 남아 있었다.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곳은 아무래도 숙박시설인데, 한류 열풍이 불면서 상업용 건물을 작은 호텔로 바꾸는 일이 유행했다. 지금 그 호텔들은 문을 열 여력조차 없어 보인다. 대형 호텔과 호텔 체인점들은 호캉스와 장기 이용권을 싼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보름권과 한달 숙박권은 인근 고시원만큼 싼 가격이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골목 깊숙한 곳에 오래된 맛집이 숨어 있다.

골목 깊숙한 곳에 오래된 맛집이 숨어 있다.

대연각 빌딩 뒤편으로 수십년 자리를 지켜온 음반가게 ‘부루의 뜨락’은 여전히 문을 열고 있었다. 한류 덕분에 회생하는가 싶더니 음반보다 스트리밍이 대세가 된 시절 저 가게를 언제까지 명동에서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명동성당 쪽 오래된 음반가게 ‘돌체’는 진즉 폐업을 했고 그후 들어온 가게들도 수없이 업종을 바꿨다가 이제는 빈 점포로 남아 있다. 얼마 전 명동 일대의 공실률이 60%를 넘어섰다는 기사가 보도됐는데, 길가에 붙은 업소의 공실률은 그를 훌쩍 뛰어넘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질병 사태를 겪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관광객과 상관없이 칼국수 솜씨를 뽐내던 오래된 식당이며 콩나물국밥을 싸게 팔던 밥집도 함께 문을 닫았다. 다 같은 사정으로 명동이란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더라도, 고난은 서민들의 설자리를 빼앗아갔다. 질병은 자연의 현상일 수 있지만 그 늪을 건널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길은 함께 찾아야 한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친다는 사실을 기억해 이 고난의 시기를 버티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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