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파이터’로 한 시대 풍미한 방학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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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밑천,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만화가 방학기 화백(76)은 평생을 ‘이야기’ 속에서 살았다. 고향인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시장 싸전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저녁마다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오는 이웃 청중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각본가이자 배우, 연출가가 되어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며 듣는 이들을 홀리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야기꾼’으로 살아갈 앞날의 밑천을 축적했다. 이후 명확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어떤 소재에 꽂히기만 하면 전국을 돌며 수집했던 방대한 자료들은 그의 이야기 곳간을 든든히 채웠고, 베트남전이 벌어지던 정글 속에서 만난 전우의 삶까지도 이야기를 꽃피우는 데 밑거름이 됐다. 바쁜 연재 일정 중에도 틈만 나면 찾던 영화관 스크린 속 장면들 역시 끊임없이 솟아나는 작품 구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말했다.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대중에게 알려진 <다모>와 <바람의 파이터>, <감격시대> 같은 작품 외에도 <타임머쉰>, <꽃점이>, <임꺽정>, <바리데기> 등 선 굵은 시대극화와 성인극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그는 30년 동안 살았던 인왕산 자락 한옥을 떠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 터였다. 이사하면서 많은 책과 자료들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그의 집 거실과 서재에는 여전히 창작을 위해 쓰였던 책들이 빽빽했다. <연려실기술>부터 레슬링·복싱·가라테 등의 무술 교본까지, 작품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지점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려 했던 그의 열정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5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자택에서 진행됐다.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했다.

“홍제동에서 30년을 살았다. 사실 홍제동이 의미심장한 곳이거든. 옛날 한양에서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렬이 하룻밤 묵던 곳인데, 1년 넘게 걸리는 길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자신의 존망을 무당에게 물었어. 홍제동의 ‘제(濟)’가 ‘물 건널 제’거든. 이승과 저승 사이 삼도천을 건넌다는 뜻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작품만 하면서 산 거지.”

-무속에 대한 이해가 <꽃점이>나 <바리데기>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나.

“한때 무당 따라서 동해안 산신당도 가고, 진도 씻김굿까지 찾아서 전국을 수없이 돌아다니곤 했다. 자료 조사와 수집을 위해서였는데, 신비한 걸 느꼈다. 무당은 거울뉴런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상대의 기분도 마음도 알지. 보통 무당은 과거 일은 알아도 미래 일은 모른다고 하잖아. 그런데 그걸 뛰어넘은 사람들이 있다. 무당이 한편으로 파이터와 너무나 동일한 점이 많다고 느낀 것도 그 때문인데, 정말 뛰어난 파이터들은 싸워야 할 순간에 앞으로 어떤 식으로 싸움이 진행될지 찰나 동안 머릿속에 다 그려진다고.”

-그런 능력은 어떻게 키워진 걸까.

“파이터는 못 보면 죽는다. ‘사방할(四方割)’이라고 면을 4등분해 대련이 벌어지는 공간을 파악하는 훈련이 있는데, 진짜 달인은 8등분, 64등분해 모눈종이처럼 면을 나누는 것을 넘어 입체적 공간까지 그렇게 나눠 상대와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파악할 수 있다.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은 사람이 쌓은 고도의 결투 경험 덕에 무예가를 뜻하는 ‘파이팅 아티스트’를 넘어 ‘파이팅 샤먼’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무당과 파이터의 능력처럼 이야기를 실감 나게 풀어가는 능력도 노력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 아버지 얘기를 해야 한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지게 벗고 도시로 온 사람이라 거의 무학(無學)이다. 그러니 스토리 작법이니 플롯 같은 걸 배운 적 없는데도 지금 생각하면 작법이나 서사의 기본을 혼자 터득하셨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란다. 쌀장사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지면 어둑어둑한 등을 켜놓은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러 온다. 별스러운 이야기도 아니고 콩쥐팥쥐, 심청이 이야기처럼 누구나 아는 빤한 이야기를 하는데 같은 이야기를 해도 아버지 이야기는 왜 재미난지 생각하곤 했지.”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표현하는 훈련을 받은 셈인가.

“서사란 게, <햄릿>만 봐도 끊임없이 새로운 공연이 나와 저마다 다 다른 것과 같다. 할리우드 영화를 봐도 오프닝부터 피가 튀고 비명이 낭자한 장면을 보여준 뒤 플래시백해서 거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듯, 책이라고는 외상장부밖에 없는 양반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대신 거꾸로 세웠다가,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평행하게 펼치는 더블 시퀀스를 썼다가 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아신 거다. 또 가령 <숙영낭자전>에서 어느 처녀가 나쁜 원님한테 살해당해 원귀가 되는 장면은 이렇다. ‘대밭에선 댓잎이 부딪치는 소리만 씩씩 나고 달이 사라지는데’ 하는 순간 말을 끊어. 그럼 소름이 쫙 끼치지. 서스펜스 기법처럼 사람 마음을 졸이는 거야.”

-그렇게 익힌 이야기 방법을 작품 속에서 많이 활용했나.

“<바람의 파이터>에서도 최배달이 고수와 붙을 때는 처음부터 치고받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스톱모션처럼 동작이 멈춘 뒤 결정타가 들어가는 거지. 결정적인 장면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 응력이 쌓이는 것과 같이 완성되지. 최배달이 일본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유도·검도 고수들한테서 도전장을 받으면 대결 전날 밤 잠이 오겠나 엎치락뒤치락하지. 당일에는 죽을지도 모르는데 시신이 지저분하면 안 되니 속옷을 갈아입는 모습도 그리고. 나도 그런 마음으로 그리는데 독자 전화가 와. ‘당신 인기 있다고 숨 막히게 질질 끄는 거냐’라면서.”

-매일 연재하는 작품을 만들 때는 작품 속 인물처럼 전전긍긍한 날도 많았겠다.

“이럴 때도 있다. ‘다모’가 바닷가에 간 장면 그릴 때를 예로 들면, 홍제동 집에서 커튼 닫고 누워 있어. 그러면 눈앞에 다모가 나오고 바닷가 짠내음도 나. 공감각이라고, 감각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떠오르면 옆방 흰종이에 그림이 보여. 그려놓은 것처럼. 그런데 그럴 때는 극히 일부고, 이런저런 심상의 준비 단계가 필요할 때가 많지. 대부분은 일간지 연재니까 마감 시한이 다가오면 초침이 지나가는 게 시한폭탄처럼 느껴지고 무서워. 참담해. 종이는 점점 커지는데 뭘 그리냐 하는 백지 앞의 공포. 건강검진을 할 때 의사가 시간에 쫓기는 직업이냐고 묻더라고. 스트레스받으면 나오는 코르티솔 수치가 높다고. 창작자는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어. 온몸 구석구석 느끼는 압박감으로 가위도 눌리고 꿈에서 벽이 좁혀져 오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큰병은 없으니 다행이다.”

방학기 화백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 중 최배달이 1 대 다수의 격투를 벌이는 장면 / 도서출판 길찾기

방학기 화백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 중 최배달이 1 대 다수의 격투를 벌이는 장면 / 도서출판 길찾기

-어떻게 압박감을 이겨냈나.

“그게 밥벌이의 힘이자 무서움이지. 그리고 자료 싸움. 살인적인 자료수집 없이는 무서워 못 그린다. <다모>로 예를 들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담론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서민들의 미시사는 알려진 게 없고 찾을 수 있는 자료도 박하다. 조선시대 경찰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당시 범죄는 어떤 게 있었나 찾으려면 인터넷도 없으니 발로 뛰어야 했다. 대학 경찰학과 가서 조선시대 범죄 다룬 논문도 보고 부지런히 메모했지. 그렇게 시대를 보면 희한해. 어떤 때는 유괴가 많은 시절이 있었는데 대갓집 아들 유괴하는 게 아니라 화적패나 유민들이 어느 문중의 선산을 뒤져 무덤을 파고 조상님 해골만 가져가. 유골을 유괴하는 거지. 또 어떤 시대엔 처와 첩 간의 질투 때문에 벌어진 살인사건이 많고. 이렇게 시대마다 유형이 다른 자료를 모아 종류별·시기별로 나누면 자료와 자료끼리 신호를 주고받아. 서로 연계되고 패턴이 생겨서 그게 커지면 아지랑이처럼 이야기가 태어나.”

-촘촘히 모은 자료가 바탕이 되지만, 그 사이를 연결하는 영감이 결국 작품을 완성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많은 사람이 작품을 보고 허구와 실제를 오해한다. 모르는 사람은 <바람의 파이터>가 최배달 일기 같다고 한다. 전혀 그렇지 않아. 모든 것은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때 최배달이 뭘 봤을까, 어떻게 느끼고 행동했을까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서 생각하며 채워넣어 그린 것이다. 예술은 다 사기다. 그런데 이 사기는 세상에 나 혼자만 칠 수 있다. 창조니 창작이니 표절이니 얘기하지만, 가만 보면 다들 사려 깊은 모방일 뿐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 직접 옆에서 봤냐는 소리 듣기도 했다. 모든 것은 허풍인데 누가 어떻게 ‘썰’을 잘 푸느냐가 문제지.”

-그럼 이야기라는 건 도대체 뭘까.

“이야기하는 것의 본원은 뭐냐면, ‘서사가 존재다’라고 할 수 있지. 말 속에 태어나 말 속에 죽어. 모두가 자신의 탄생설화를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를 규명하고 의미를 줄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 아닌가. 서사 없는 인생은 없어. 내가 사람 이야기를 많이 다뤘지만, 그 작품들도 결국은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였다. 나의 바람과 소원, 또 실현된 꿈이 그 안에 속속들이 들어 있지.”

-이야기, 내러티브에 중점을 둔 만화로 독특한 위치에 섰다.

“나를 두고 만화가라 해야 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내 위치가 독특해 비슷한 스타일이 잘 없다. 그래픽노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그림과 문학의 중간지점에 있으니. 물론 고우영 선생처럼 이야기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천재적이었던 작가가 있지만. 하다 보니 그리됐는데 보통의 독자들은 만화는 만화 같아야 한다는 기대수준이 있어. 그래서 어느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그 덕에 한국 만화가 해외로 진출하는 일이 드물던 시절에 일본 등 해외에서도 많이 팔렸다.

“홍제동 집은 엔화로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지금은 K콘텐츠가 세상을 잡고 있지만, 내가 만화할 때만 해도 대중문화 수준이 크게 열세였다. 처음 <임꺽정>을 번역 출판하겠다고 일본까지 갔을 때 등장인물이 몇명이냐 묻더라고. 그래서 한 몇백명 된다 하니, ‘가히 대륙적이다’ 그러더라고. 당시 일본에서는 그게 대륙적인 스케일로 여겨졌나봐. 또 프랑스 여행 갔을 땐 <다모>가 CD로 나와 있던데, 프랑스 사람이 묻더라. 한국에서는 중세에 벌써 여자 형사가 있었다니 사실이냐고. 그런 점은 자부심도 들지.”

-세세한 디테일은 물론 장면 처리도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던데.

“나를 키운 건 8할이 영화야. 거의 미친 듯이 봤다. 모든 예술을 아우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자아서사를 풀어내는 게 영화니까. 일주일에 엿새를 연재할 때 연재 없는 하루는 우유랑 빵 들고 극장과 극장 사이를 뛰면서 상영 중인 영화들을 하루 만에 다 돌아보려고 한 적도 있다. 그 영화 다 기억하느냐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기억할 필요 없어. 여러 장면 중 서로 싸워서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장면만 있으면 되니까. 사실 진짜 원한 건 만화가가 아니라 영화 연출을 해보고 싶었다. 기막힌 상징과 은유의 앨프레드 히치콕이나 99%가 원작을 뛰어넘지 못하지만, 그 1% 뛰어넘는 작품을 만든 데이비드 린 같은 감독은 관객을 사로잡잖아. 먼 여행을 했다 돌아오는 인간 영혼을 잡아채는 그런 이야기 말이지.”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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