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서 앤 매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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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정신세계가 통하는‘천재와 광인’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다. 천재성과 광기는 종이 한장 차이다. 사실 100년 이상 걸릴 일을 몇년 내에 끝내겠다는 목표는 무모한 도전이다.

제목 프로페서 앤 매드맨(The Professor and the Madman)

제작연도 2019

제작국 아일랜드, 미국, 프랑스

상영시간 124분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원작 사이먼 윈체스터 <교수와 광인>

각색 토드 코마르니키, P.B. 셰므란

감독 P .B. 셰므란

출연 멜 깁슨, 숀 펜, 나탈리 도머, 스티브 쿠건, 에디 마산, 제니퍼 엘

개봉 2021년 6월 2일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그린나래미디어(주)

그린나래미디어(주)

이미 이야기는 그럴싸하게 돌고 있었다. 원작자 사이먼 윈체스터가 ‘교수와 광인’ 이야기를 탐사해 1998년 논픽션으로 내기 전부터다. 옥스퍼드 사전 작업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구세주처럼 등장해 난제를 풀어낸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광인 이야기. 사이먼 윈체스터의 책이 번역돼 있었는지 몰랐는데, TV 교양프로그램에 소개돼 꽤 주목도 받은 모양이다. 출판사가 내놓은 홍보카피는 이렇다.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진짜로 

영화 이야기를 하자.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사와 말글을 다 수록한 사전을 만들어보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제임스 머리(멜 깁슨 분)다. 14세에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는 변변한 학력도 없다. 그럼에도 서양권과 근동의 언어까지 다 마스터한 언어학의 대가였다. 말하자면 천재다. 거기다 비범한 기획력도 있다. 100년이 걸려도 끝나지 않을 그 작업을 5년 이내에 끝낼 방법은? 집단지성의 동원이다. 출간된 모든 영어권의 책에다 자신이 발견한 단어와 그 단어의 인용례를 적어 보내주십사, 하는 전단을 삽입하는 것이다. 전단을 본 독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사전 편찬의 난제를 돌파하는 것이다. 19세기판 위키피디아라고나 할까.

그러나 쉽지 않았다. A항목 하나 하는데 몇년이 걸렸다. 그의 방법은 단어의 역사적 용례를 통한 진화를 찾는 독특한 방법이었는데, 19세기 모든 사람이 쓰고 있던 ‘approve’의 17세기에서 단어적 기원을 찾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답은 1667판 밀턴의 <실낙원>에 있었다. 아무튼). 그리고 구세주의 등장. 그는 종군 외과의사 출신이다. 외과의사이니 전장에서 수많은 신체 훼손을 목격했을 텐데, 정작 그에게 트라우마가 된 사건은 붙잡힌 탈영병의 얼굴에 달궈진 쇠로 낙인을 찍었던 일이다. 그게 트리거가 돼 조현병이 발발한다.

영화의 시작 장면. 그 남자 마이너(숀 펜 분)가 영국의 뒷골목에서 한 남자를 그 탈영병으로 오인, 죽인다. 남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아내의 품 안에 안긴 채 총상으로 죽었다. 재판을 받았으나 배심원은 그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유죄판정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신병동에서 보호감호 조치를 받는다. 여전히 감옥 마룻바닥 사이로 탈영병이 스며들어와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앞서 머리의 사전 편찬 호소문을 읽고 동참한다. 그리고 놀라운,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해 수천개의 난제를 풀어내 머리의 프로젝트에 동참한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다. 천재성과 광기는 종이 한장 차이다. 사실 100년 이상 걸릴 일을 몇년 내에 끝내겠다는 목표는 무모한 도전이다. 결국 무언가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목표다. 무언가? 사적인 영역, 가족이다. 공적 대의의 헌신 아래엔 항상 가정-아내와 아이들의 희생이 뒤따른다. 머리는 아예 자신의 집 마당에 작업실을 만들고 매일 그곳에서 밤을 지새운다. 그렇다면 형제와 같은, 또 다른 자아 마이너의 경우는 어떤가. 정신병동에 갇힌 그에게는 사적인 삶이란 없다. 24시간 감시대상이다. 평생을 매달릴 프로젝트는 이 남자에게 탈출구였다.

천재성과 광기, 종이 한장 차이

영화는 아마도 사이먼 윈체스터의 논픽션에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을 내밀한 이야기-머리와 머리 부인 관계, 그리고 마이너와 자신이 쏴죽인 남자의 부인이 ‘썸’타는 이야기를 대칭해놓고, 스토리 전개의 핵심축으로 삼는다. 아마도 알려진 내지는 복원된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편집증 내지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지만, 서로의 정신세계는 통하는 두 남자의 우정 이야기쯤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사와 원작의 영화 판권을 사들인 멜 깁슨이 벌인 오랜 분쟁의 실마리가 잡힌다. 깁슨이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각각의 남녀의 사랑을 매개로, 그들의 욕망이 대업으로 승화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공의에 집착하는 두 남자의 거울쌍 같은 천재적 광기가 대비하는 걸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에 기반을 둔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는 그의 감독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를 떠올려보라. 결국 영화사가 재판에서 이겨 편집권을 행사하게 됐지만, 멜 깁슨 편집판의 ‘교수와 광인’ 이야기를 언젠가 보고 싶긴 하다.

사전편찬 공식 역사에 마이너의 이름은 없다

oed.com

oed.com


인터넷 시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어떻게 됐을까. 이젠 온라인 시대다.

옥스퍼드 사전 홈페이지(oed.com)에 들어가 보면 이런 안내문구가 있다. “많은 공공도서관이 OED를 유료구독하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공짜로 쓸 수 있는 온라인 사전이 아니다. 연간 ‘단돈(just)’ 100달러를 내야 한다. 지난 3월 업데이트 공지를 보면 젠더 임금 격차(gender pay gap), 미투(me-too), 필수노동자(essential worker) 등을 약 1400개 단어를 새 어휘로 등록했다고 한다.

사이트의 역사 항목을 보면 사전 프로젝트는 1857년 런던철학논리학회(London Philological Society)가 처음 시작했으며, 제임스 A. H. 머리(사진)와 옥스퍼드 대학출판부가 새로운 영어사전을 만들기로 계약을 맺고 작업을 시작한 것은 1879년이다.

옥스퍼드 사전 측은 머리가 어떠한 구상을 했고, 어떻게 작업했는가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머리는 이 작업을 위해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는 작업장을 지었고, 2t에 달하는 인용문 뭉치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제임스 머리의 작업은 브래들리(1845-1923)가 이었고-그는 원래 B에 해당하는 항목을 정리하기 위해 고용됐다-그는 40년 동안 E-G, L-M, S에서 Sh까지 작업을 하고 바통을 넘겼다. 3대 편집장은? 윌리엄 크레이기(1867-1957)다. 4대 오니언스 편집장에 이르러서야 Su-Sz, Wh, 그리고 X, Y, Z까지 마무리됐다. 오니언스는 사전을 마지막 단어인 ‘Zyxt(비누 이름)’을 등재하는 데 자신이 기여했다고 자랑하곤 했다 한다. 프로젝트 초창기 지대한 기여를 한 ‘광인’ 마이너에 대한 이야기에는 사이트 사전편찬 공식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평생 동지인 머리가 그토록 그의 이름 등재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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