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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진실 알린 게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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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중항쟁> 펴내 옥살이 한 김명식씨, 31년 만에 재심 청구한 ‘그’의 이야기

한국 현대사의 큰 비극인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알리려고 했을 뿐인데 감옥에 갔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책 <제주민중항쟁>을 썼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한 시인 김명식씨(76) 이야기다. 4월 1일 김씨는 31년 전 법원이 내린 유죄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제주 4·3 사건 때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된 수형인들과 행방불명된 사람들에게 법원이 최근 잇따라 재심 무죄를 선고하고, 희생자 배·보상과 특별재심을 담은 제주 4·3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상황에서 김씨의 재심 청구는 또 한 번의 제주 4·3 진실찾기다. 그를 3월 14일 강원도 화천군 집에서 만났다.

[포커스]제주 4·3 진실 알린 게 죄인가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를 포함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참사다. 냉전과 남북 분단의 한반도 역사 속에서 제주 4·3 사건에 덧씌워진 이념적 시선 때문에 이 사건은 수십년간 제대로 정의조차 되지 못했다. 독재정권 하에서 제주 4·3 사건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소련이나 북한, 또는 남로당 지령에 의해 제주도와 한반도를 적화시키기 위해 공산도배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돼왔다. 군경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은 무장유격대원이거나 그 동조자로 여겨졌고,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제주 4·3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아

김씨가 <제주민중항쟁>을 쓰게 된 것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북제주군 애월면 하귀리에서 태어난 그는 제주 4·3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어릴 때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했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 어머니랑 피난을 갔어요. 산밖에 없어요. 살아남으려면 가는 거죠. 인간의 본능이에요. 동네 사람들과 잔솔밭에 들어가 숨었어요. 그런데 동생이 막 울어요. 동네 사람들이 ‘저 아이 때문에 우리 다 죽는다, 저 아이 때문에’라고 하는 거예요.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면 아이 입을 막아 죽여야 합니까? 어머니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어머니가 가만히 있다가 결단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 내려가자.’ 어머니가 동생을 안고, 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산에서 내려왔어요. 반드시 죽는 거죠. 산에 갔고, 하산했으니까요. 어머니는 두려움이 있었겠지만 나는 겁이 나지 않았는데 어머니 치맛자락이 내 얼굴을 싹 스쳤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어머니가 제일 먼저 한 건 밥을 짓는 거였어요. 새끼를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밥을 먹었는데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고, 밤에 잠을 잤는데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어요. 4·3의 소리가 계속 들려요. ‘귀울음’이라고 하지요. 지금도 귓병으로 남아 있어요.” 돼지가 목덜미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 총소리 뒤로 어떤 사람이 돌담을 넘어 도망치던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남았다. 귀엔 자꾸 ‘살려달라’는 소리가 맴돌았다.

‘4·3이란 무엇인가’, ‘왜 제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김씨를 계속 따라다녔다. 정작 아무도 4·3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정부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시와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나 죽지 않았다,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는 생존 신고의 하나였지만, 쉽게 쓰여지지는 않았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며 수사신부 수업을 받던 1976년 김씨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1983년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어를 독학하면서 제주 4·3 사건 이후 일본으로 간 제주도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소설 <화산도>를 쓴 김석범씨도 그때 만났다. 제주 4·3과 관련된 일본 자료와 미군정의 정보보고서인 이른바 ‘G-2 보고서’ 등 미국 자료를 긁어모으고 분석했다. 제주 4·3 사건은 반란이 아니라 항쟁이라는 데 생각이 모였다. 김씨의 생각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사건이 일어난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로 확장됐다. 생명과 평화, 아픔 없는 세상이 그의 화두가 됐다.

시인 김명식씨가 강원도 화천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를 둘러보고 있다. / 시인 김명식씨의 아들 김일목씨 촬영·제공

시인 김명식씨가 강원도 화천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를 둘러보고 있다. / 시인 김명식씨의 아들 김일목씨 촬영·제공

일본에서 돌아와 ‘아라리 연구원’ 설립

1987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씨는 ‘아라리 연구원’을 설립했다. 아라리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준말이다. 모든 사람은 생명과 오순도순 평화를 누리며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고, 인종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이 아라리 연구원에서 이듬해 <제주민중항쟁>을 발간했다.

<제주민중항쟁>은 3권으로 구성돼 있다. 제주 4·3 사건의 현대사적 의의와 좌파·우파·극우파의 시각을 소개하고, 각종 자료를 취합한 내용이다. 대학생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 제주 4·3을 다룬 현기영씨의 소설 <순이 삼촌>과 이산하씨의 시 <한라산>도 주목을 받으며 제주 4·3을 제대로 알자는 목소리가 공론장에 나왔다.

“나는 책의 (목적을) 서문에 분명히 밝혔어요. 제주 4·3의 진상과 원인을 아직도 잘 모르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물건이니까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백일하에 자료를 발표하자고요. (…) 누군가는 3만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나는 8만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썼어요. 호적상 3만명인지는 모르겠지만 호적이 없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이념적으로 빨갱이라고 해서 3만명을 죽였다고 합시다. (구체적으로) 왜 죽였는지를 밝히지 못하면 직무유기 아니에요? 군인도, 미국도요. 결국 4·3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고 태평양을 점령하려던 미국이 한국에 들어와야 하는데 만만한 게 제주도였던 것이죠.”

책을 낸 지 3년이 지난 1990년 7월, 치안본부가 아라리 연구원에 들이닥쳤다. 김씨와 출판 관계자들을 연행했다. 노태우 정권이 정치인과 종교계 인사 등을 전방위적으로 탄압하던 와중이었다. 수사기관은 김씨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연결된 반국가적인 조직인 간첩단 사건으로 엮으려고 했다. 김씨에게 국제간첩단 활동을 했는지, 배후가 누군지 등을 추궁했다.

김씨 측은 당시 영장 없이 체포·연행됐고, 조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던 점을 재심 사유로 주장하고 있다. 강제연행된 후 잠을 자지 못하도록 여러 수사관이 돌아가며 24시간 신문했고, “너, 완전 간첩이지? 새빨간 빨갱이구먼” 식으로 김씨를 닦달해 허위진술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김씨를 변호하는 이정일 변호사는 “(수사기관은) 조총련과 연결된 반국가적인 조직으로서 국제간첩단 활동 내용에 대해 김씨에게 밤낮없이 반복해서 진술하도록 강요했다”며 “노태우 정부의 공안 당국은 김씨에 대해 국제간첩단 혐의를 두고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김씨를 강제로 체포했던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4월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2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4월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2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결국 검찰은 반국가단체인 북한 찬양·고무, 이적표현물 제작 등 혐의를 적용해 김씨를 재판에 넘겼다. “4·3 사건은 미국 공격에 항거해 일어난 봉기이고, 제주도 민중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빨갱이가 된 사건이 아니다”는 책 내용과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를 인용한 것을 문제삼아 <제주민중항쟁>이 이적표현물이라고 했다. 이 변호사는 “필요한 범위 내에서 (다른 책의) 인용은 학술 방법론에 따른 것일 뿐이고, 학문의 자유로서 마땅히 보장돼야 한다”며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도 아니었다”고 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징역 1년 6월과 자격정지 1년 6월의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항소는 기각됐다. 평화의 관점에서 제주 4·3 사건을 보자는 게 그의 주장이었지만, 국가는 이념의 잣대로 평가했다. 검찰과 법원이 이적표현물이라고 한 <제주민중항쟁>은 현재는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정말 이적표현물이 맞을까, 이적표현물이란 무엇일까.

<제주민중항쟁>은 이적표현물일까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52년, 김씨가 감옥에 간 때로부터도 10년이 지난 2000년. 김대중 정권 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에 따라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조사 끝에 제주 4·3 사건 때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고,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주민들이 대거 희생당했다고 결론냈다. 미군 보고서엔 ‘중산간지대의 모든 주민이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었다”며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여전히 제주 4·3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씨는 제주 4·3 사건은 과거만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기에 사건의 역사적 맥락을 계속 되짚어야 한다고 했다. “제가 알던 할머니가 턱이 없어요. 총을 맞아서요. 4·3이 빨갱이 때문이든, 뭐든 다른 것 없습니다. 턱을 고쳐내라, 이거예요. 첨단기술이 플라스틱으로 턱도 만들고 이빨도 만들지만, 그분은 턱이 없어 돌아가신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했죠.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라고요. 정치는 안 했습니까? 종교는요? 재벌은요? 지금은 안 하는 것 같지요? 이름만 노동자지 노예입니다. 농촌 사람들은 갈 데도, 올 데도 없어요. 이건 전쟁이죠. 이젠 총 쏘는 전쟁 안 합니다. 무슨 놈의 이념, 우리는 계속 속는 거예요. 정치가한테 속고, 권력가에게 속고, 자본주의라는 돈과 자본에 속고 있어요. (…) 우리는 4·3을 살아야 한다고 봐요.” 재심은 법원의 개시 결정으로 시작될 수 있다. 김씨 사건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심리한다.

<화천 | 이혜리 모바일팀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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