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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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없는 빨래통을 내려다본다. 여간해선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빨랫감을 모아놔도 죄다 수건뿐, 양말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밖에 나가게 되면 집을 나서기 전 꼭 패딩 안주머니를 확인한다. 붕어빵 충동구매에 대비해 넣어뒀던 현금 3000원은 빠지고 손세정제가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상이 바뀐 것만큼이나 거리풍경도 달라졌다. 자주 가던 동네 밥집은 문을 닫았고, 평일 저녁에도 줄이 늘어서 있던 식당조차 한산하다. 외출할 때마다 ‘임대 문의’가 붙은 가게가 매번 많아지는 듯한 생각이 드는 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비자발적 실직자가 사상 최초로 200만명을 넘고, 그중 구직 포기자 역시 160만명 가까이 된다는 조사 결과를 굳이 들먹일 필요조차 없이 통계수치와 체감 위기가 일치하는 드문 경험을 한다. 자영업자, 취업준비생, 소상공인의 피눈물이 배었을 골목골목에 빨간 경고등이 윙윙 울리는 것 같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증시를 보면 ‘빨간 경고등’이란 표현이 어딘가 이상해진다. 주식에서 내가 산 종목에 빨간 불이 들어온 날은 기분 좋은 날이다. 코스피지수가 장중 3000을 넘은 날 주요 종목은 일제히 붉게 빛났다. 최소한 주식투자의 세계에선 ‘빨간 희망등’이란 말이 더 적확해 보인다.

그 희망의 실체를 들여다보기란 어렵지 않다. 가끔 한 주식 종목의 토론 게시판을 구경한다. 이 종목은 주가가 최근 1년간 700% 넘게 상승했다. 들뜬 분위기 속 “사두기만 하면 돈이 복사되는데 안 하면 바보”란 누군가의 글이 눈에 박힌다. 그곳에선 다들 “올랐으면 좋겠다”, “올라야 한다” 같은 주문을 외고 있다. 돈이 돈을 복사하고 있으니 계좌에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 돈을 놀리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불안’이 증시를 떠받치는 희망이다.

장외에는 또 다른 불안이 감돈다. 최근 SNS에서 “주식으로 얼마 벌었는지 올리는 건 생계를 잃은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드는 행동”이라는 주장을 봤다. 돈을 그냥 두면 바보가 되는 빨간 호황 속, 가만히 놔둘 돈조차 없어 자동으로 가난해지는 이들이 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들과 희망론자 간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이다. 희망을 출렁이게 하는 데는 파란 불 한 번이면 족하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이 ‘K자 양극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위기를 분기점으로 누군가는 ‘떡상’(우상향)하고 누군가는 ‘떡락’(우하향)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라가고 내려갈지는 모른다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상승 곡선을 탄 이들은 앞으로도 쭉 더 많은 부와 안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번 알파벳 ‘K’의 허리에서 갈리고 나면 아래 곡선에서 위의 곡선으로 옮겨가기란 설국열차 꼬리칸에서 앞쪽칸으로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울지 모른다.

“주식은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 이 말을 금언 삼아 개미들은 오늘도 ‘존버’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존버의 법칙은 모두에게 통하나. 이미 내리막 곡선 초입에 들어섰다면 존버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겨우 본전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부동산, 일자리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언제까지 계좌가 붉게 빛나줄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의 빨간 호황에 속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렵다. ‘증권계좌가 빨갛다’고 위안 삼으면서 말이다.

‘꼬다리’는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실마리를 뜻하는 꼬투리의 방언이다. 10년차 이하 경향신문 기자들이 겪은 일상의 단상을 소개한다. ‘꼬’인 내 마음 ‘다’ 내보이‘리’라는 의미도 담았다.

<김서영 정책사회부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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