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에게 놀 권리 보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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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에는 놀이터가 없어서 아파트 안에 있는 놀이터를 찾아가서 놀고, 날씨가 추워지면 추위를 피해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가서 놀아요. 친구들과 수다도 떨 수 있고, 춥지도 않고 눈치 볼 사람도 없어서 좋아요.”

광주 북구의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10월 12일 물리적 거리 두기가 1단계로 하향되자 오랜만에 등원해 함께 어울려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광주 북구의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10월 12일 물리적 거리 두기가 1단계로 하향되자 오랜만에 등원해 함께 어울려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초등학교 6학년인 이의령양(12)은 코로나19 이전까지의 또래 놀이 풍경을 담담하게 전했다. 학교를 마친 뒤 출출한 친구들은 먼저 편의점에 들른다. 간식으로 배도 채울 수 있고 얼마간은 신나게 대화하며 놀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점원이나 다른 손님의 눈치를 보게 된다. 초등학생 주머니 사정이 간식을 계속 주문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긴 어려운 탓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온 이양과 친구들은 놀이터를 찾는다. 거리가 멀어도 놀이터가 있는 곳은 아파트단지뿐이다. 추워지면 지하주차장을 찾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하루 학습시간 6시간, 여가시간 49분

주차장이 놀기 적합한 곳이 아니란 사실쯤은 어른들이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공기도 좋지 않고 어둡기도 하지만 그래도 추운 밖에 있는 것보다 좋다”는 이양은 “어두워서 휴대폰 불빛을 켜야 하고 와이파이가 되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핫스팟을 써야 할 때도 많아 서로가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어른들은 그럴 바에 집에 와서 공부나 하라고 할 테지만 이미 공부에 쓰는 시간은 많다. 부족한 것은 놀 시간과 공간이고 필요한 것은 놀 권리라는 것이 이양과 친구들의 주장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를 보면 초등학생의 하루 평균 여가시간은 49분, 부모와 보내는 시간은 48분에 불과하다. 하루평균 학습시간 6시간 49분과 대비된다. 놀거나 쉬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짧고 학교 수업, 학원·과외 수업, 스스로 하는 공부에 쓰라고 요구받는 시간은 길다 보니 어린 나이부터 평소에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시간압력’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아동들의 행복도 평균은 6.6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아동들의 행복도와 비교할 때 최하위를 기록했다.

시간 부족만이 문제는 아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대면 접촉은 물론 놀이에 활용할 수 있는 기구나 시설 이용이 제한되면서는 놀 수 있는 공간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학교 3학년 김은하수양(15)은 “평상시 청소년들이 자리의 반을 차지하던 피시방과 노래방엔 청소년 출입이 금지되었고, 운동장에서 농구와 축구를 하는 것은 물론, 모여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가 중단되었다”고 말했다. 어린이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형태의 놀이가 필요하지만 코로나19를 차치하더라도 피시방과 노래방 등의 놀이공간이 불건전한 곳으로 받아들여지는 탓에 정작 놀 만한 공간은 찾기 어렵다는 한탄이다. 김양은 “청소년에게 놀이는 더 이상 놀이터에서 뛰노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7년 6월 15일, ‘놀 권리’를 보장하는 조례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전남도의회에서 제정됐다. 그해 2월 발의된 ‘어린이들의 놀 권리 보장에 관한 조례’가 팽팽한 찬반 대립을 거쳐 4개월 만에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아동의 놀 권리를 첫 자치 법규로 명문화한 것이다. 당초 발의안에는 놀이 활동을 정규 수업시간에 넣는 내용까지 포함됐지만, 일부 의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전남교육청이 매년 놀이 활동과 관련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놀이시설 안전, 프로그램 보급 등이 포함된 지원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선에 그쳤다.

전남교육청의 뒤를 이어 지방자치단체로서는 광주광역시 서구청이 2017년 10월 첫 조례를 통과시켰고, 광역지자체로서는 경기도청이 2019년 6월 ‘놀 권리’ 조례를 제정하며 전국 곳곳에서 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아동·교육 관련 시민단체들이 모인 ‘아동 놀이권 조례 제정을 위한 시민연대’는 지난 8월 조례 제정안이 발의된 서울시의회와 서울시를 상대로 조례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광역지자체 6곳 놀이권 조례 통과

당사자인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이 또래의 시각으로 놀이가 부족한 현실을 지적하고 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안 마련에 나선 것도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이다. 지난 10월 열린 ‘서울시 아동의 놀이권 보장을 위한 토론회’나 온라인 시민토론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에서의 놀이권 보장 조례 토론장 등 시민의 논의를 수렴하는 자리마다 ‘놀이권’ 또는 ‘놀 권리’를 외치는 아동들이 나서고 성인들이 이를 지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시의회의 조례 제정안이 통과되면 놀이권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준비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놀이권 조례는 유엔 아동권리협약 등 선언적인 수준을 넘어 실제 놀이 현장에서 어떤 지원과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 조례 제정 이후 바뀐 학교 현장에서의 모습을 보면 구체적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전남 영암군 삼호중앙초등학교가 전남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꿈놀이터’ 사업을 보면 교내 건물과 건물 사이 옛 주차장 터 같은 빈 공간에 사방치기나 과녁 맞히기 등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운동장 한쪽 잔디 언덕과 모래놀이 공간 주변으로 미끄럼틀 같은 놀이기구를 세우고 뛰놀다 지치면 쉴 수 있는 쉼터와 휴식 벤치, 해먹 등이 설치됐다.

올해 들어 각 광역·기초지자체와 교육청의 놀이권 조례 통과가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광역지자체 6곳, 기초지자체 16곳, 교육청 12곳에서 제정된 조례에 따라 놀이권 보장 방안을 시행하고 있고, 서울시 등 통과가 임박한 지자체에서의 대책 마련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놀이권 조례 제정에 나선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그간의 성과 못지않게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수정 놀이하는사람들 대표는 “놀이권 조례 제정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주로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목표로 경쟁적인 시행이 이뤄지면서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리거나 다양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형식과 속도에만 치중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성인의 주 52시간 이상 노동 금지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아동의 휴일 사교육 금지에는 고개를 젓는다”며 “아동의 놀이할 권리에 관한 우리 사회 인식 수준은 여전히 낮은 단계”라고 꼬집기도 했다.

특히 코로나19 확산으로 놀이의 질적 수준을 보장하기 어려워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조례 제정 등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양신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연구원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코로나19 전보다 공교육 외 공부시간은 56분 증가한 반면 운동시간은 21분 감소했고, 미디어 사용 시간은 2시간 44분 증가했다”며 “특히 개학연기 기간 낮 시간에 성인 돌봄자가 없는 아동의 미디어 과다 이용 비율이 높은 점을 볼 때 재난 때문에 아동이 겪는 불균형이 놀이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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