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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경 “가습기 살균제 안전 미흡”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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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내부 문건에서 이미 “안전한 물질로 판단하기 어려움” 밝혀

“증인으로 불려가 6시간 동안 검찰이 아닌 (기업 측) 변호인단과 싸우다시피 한 것 같다.”

임종한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5월 19일 SK케미칼·애경산업의 가습기 살균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뒤 한 말이다. 그는 이날 오후 2시부터 6시간을 법정에서 보냈다. 임 교수는 <주간경향>과 통화에서 “기업들이 지엽적인 것만 물고 늘어지고, 본질은 보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보고서 한 귀퉁이에 있는 부분을 들이대면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입증 근거가 안 된다는 논리를 댄다”고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지난 2019년 7월 5일 서울 동교동 애경 본사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애경 측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강윤중 기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지난 2019년 7월 5일 서울 동교동 애경 본사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애경 측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강윤중 기자

임 교수가 연구한 피해자는 303명이다. 이들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제조·판매한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 단독 사용자다. 가습기메이트 단독 사용 피해자의 48.98%가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지 2년 이내에 병원에 입원했다. 폐렴·급성기관지염·천식·기관지확장증 등이 이유였다.

가습기메이트는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주원료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상당수는 가습기메이트뿐 아니라 옥시의 제품도 혼용해 사용했다. 가습기메이트와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는 원료가 다르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에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 쓰였다.

임 교수는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PHMG의 주요 질환인 폐 섬유화가 CMIT·MIT에서 덜 나타나고 표본 자체가 적다는 이유를 들어 보고서의 의미를 깎아내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습기메이트 사용 환자들은 천식이 두드러지는 등 특징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노출된 뒤 사망률이 높아지는 과정은 PHMG 성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본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임상적 결과 자체로 유의미한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는 CMIT·MIT 성분이 폐 손상 없이 사망에 이르게 하고, CMIT·MIT 성분은 미량만 들이마셔도 독성에 노출된다는 연구 결과가 축적돼 있다.

검찰은 지난해 7월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현직 임원 34명을 기소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흡입독성이 있는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해 이용자들을 사상에 이르게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상 등)를 받는다.

가습기 살균제 재판은 검찰의 기소 이후 주 1~2회씩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26일에는 공판준비기일 등을 포함해 36번째 공판이 열렸다. 검찰에서 공판을 담당하는 검사는 단 두 명이다. 반면 기업 측에선 광장·대륙아주 등 대형로펌 변호사들이 공판마다 10명 넘게 투입된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측이 방어권을 십분 활용하면서 재판이 길어지고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검찰이 제출한 논문 증거에 대부분 부동의했다. 이 때문에 주요 논문 저자가 법정에 나오고 있다. 법정에 서야 하는 증인만 130여 명이다. 검찰과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증인 한 명을 돌아가며 신문을 한다. 증인 한 명에 많게는 세 번의 재판 기일이 소요된다. 재판이 1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세간의 관심도 줄어들었지만, 재판에서는 여전히 혐의 입증에 중요한 증거들이 공개되고 있다.

애경, 내부 문건서 “안전성 미흡”

<주간경향>이 가습기 살균제 공판 내용 등을 취재한 결과를 종합하면, 애경산업은 2011년 10월 이미 자사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의 안전성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내부 문건에 명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애경산업은 2002년 10월부터 CMIT·MIT를 원료로 하는 가습기메이트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원료는 SK케미칼이 제조했고, 애경산업이 제조와 판매에 관여했다.

애경산업은 2011년 10월 내부 문건을 만들었다. 정부가 2011년 8월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인체 유해성을 공식 인정한 직후다. 문건에는 ‘가습기 살균제 흡입독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건은 총 12쪽이다. 해당 문건에는 SK 측이 1994년 말 당시 이영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팀에 의뢰해 시행한 가습기메이트 흡입 독성 실험 결과를 분석한 내용이 담겼다. 실험 보고서에는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 있다. 2019년 검찰의 가습기 살균제 재수사 전까지 SK케미칼과 애경산업 모두 “1995년 흡입독성 실험 결과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애경산업은 문건에서 “실험 검토 결과, 흡입독성이 없다고 할 수 없어, 안전한 물질로 판단하기는 어려움”이라고 결론지었다. 또 “대조군과의 비교 혹은 통계학적 유의성이 없다고 하지만, 병변의 발생이 없다고 할 수 없음”이라고 했다.

애경산업이 자사 제품의 안전성 부족을 스스로 인정하는 문구도 나온다. 애경산업은 문건에서 “SK에서는 흡입독성을 거쳐서 본 물질이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실험 검토 결과 안전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매우 희박함”이라며 “1995년 당시 본 실험 결과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임상독성에 대한 판단지식도 부족했을 것으로 보여짐”이라고 썼다.

애경산업은 문건에서 “본 실험 결과는 현재, SK케미칼에서는 미처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결과에 의하여, 못 찾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여짐.(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불안감? 정보 공개 고민?)”이라고도 썼다. 애경산업은 안전성 실험 결론을 ‘부정적인 결과’로 표현했다. 이는 SK케미칼이 시행하고 애경산업이 보유한 실험 결과가 안전성을 입증하지 못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지난 2018년 2월 12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둘러싼 공정위 처분을 비판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권도현 기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지난 2018년 2월 12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둘러싼 공정위 처분을 비판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권도현 기자

애경산업은 SK케미칼 측 대응 방향도 파악했다. 애경산업은 SK케미칼이 가습기 살균제 문제의 프레임을 흡입독성 유무가 아닌 폐 질환 발병에 국한시켜 대응하려 한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애경산업은 문건에서 “SK케미칼에서는 향후, 흡입독성이 아닌 물질의 폐 침투 평가 실험을 계획하고 있음”, “SK케미칼의 대응 결과에 대비하여 다양한 독성/안전성 자료 확보 예정. 특허, 논문, 각종 공정서 및 규격집”이라고 썼다.

문건에는 ‘가습기메이트의 과거 SK케미칼과 협의 사항 및 출시 진행 과정에 대한 자료 확보 예정’이라는 대목도 나온다. 2000년대 중반 SK케미칼과 가습기메이트 제조·판매 협의 과정에서 안전성 검증이 이뤄졌는지 확인해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애경 측은 “문건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터진 뒤에 입수한 것”이라며 “‘안전하지 못하다’는 취지의 결론은 해당 문건의 실험이 불완전하다는 의미이지 가습기 살균제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검찰은 애경산업이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판매 중지 발표가 있던 2011년 8월 이전에도 해당 독성실험 결과를 보유한 사실을 확인했다. 애경 측 해명과 배치된다. 검찰은 애경산업 이미 2002년 독성실험 결과를 보유해 제품 안전성 검증이 미흡한 점을 인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애경산업은 줄곧 “제조에는 관여하지 않고 판매만 했으며, 판매 당시 SK케미칼에서 물질 성분도 제공받지 못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공정위 사건처리 과정은 여전히 미궁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책임은 정부에도 있다. 사전에 가습기 살균제에 흡입독성 물질이 쓰이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참사 수습 과정에도 허점이 많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책임이 있는 기업을 봐줬다는 비판을 받는다. 공정위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 SK케미칼·애경산업 등의 표시광고법 위반 사건을 맡았다. 공정위는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 사건처리 과정에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에 사실상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공정위는 2018년 2월 세 번째 조사 끝에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법원은 잇따라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가장 논란이 인 건 2016년 10월 사건처리 과정이다. 당시 공정위 전관들의 집요한 로비와 윗선의 외압 의혹은 핵심 쟁점이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판사격인 공정위 상임위원의 공정한 심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혹이 대표 사례다. 당시 김성하 공정위 상임위원은 수차례 공정위 전관이 포함된 로펌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김 전 상임위원은 사참위에서 “공식적 면담이었고, 사건을 조사했던 심사관(공정위 조사관)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했다”고 했다.

<주간경향>이 단독 입수한 사참위 내부 문건을 보면 김 전 상임위원의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공정위 사건 담당자는 사참위 조사에서 “주심 상임위원에게 사건을 설명하는 자리가 한 차례 있었을 뿐 심의개최일(2016년 8월 12일) 이후에는 별도 면담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2016년 8월 공정위의 SK케미칼·애경산업 표시광고법 위반 심의 개최일 전후로 기업관계자 17명이 김 전 상임위원을 수차례 방문한 사실이 확인됐다. 기업관계자 중 5명은 공정위 출신 전관이었다. 애경산업 측 법률 대리를 맡았던 김앤장 법률사무소만 보면, 김앤장은 2016년 8월 한 달 총 20여 명을 투입했다. 공정위 팀장급 퇴직자를 포함, 최소 4명의 전관과 변호사들이 포함됐다.

공정위는 2016년 심사에서 환경부가 CMIT·MIT 성분의 인체 유해성을 판단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을 제재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공정위는 2016년 9월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주선으로 환경부 측과 만난 자리에서 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답변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2017년 말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공정위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리 평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진상조사를 했지만, 외압·로비 의혹을 밝혀내지 못했다. 공정위에서 지금까지 가습기 살균제 처리 문제로 징계 등 제재를 받거나 법적 처벌을 받은 전·현직 공무원은 한 명도 없다.

검찰의 가습기 살균제 처리 과정을 둘러싼 공정위 수사도 답보 상황이다. 검찰수사는 지난 2월 고발인 조사 등을 한 뒤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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