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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한빛 PD를 추모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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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기 추모제에 산업재해 피해가족 모임 ‘다시는’ 함께

‘다시는’

10월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리는 이한빛 PD 3주기 추모제의 주제다. 산업재해 피해가족 모임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어도, 다시는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는 피해가족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 이 PD 가족을 비롯한 ‘다시는’의 열 가족이 이번 3주기 추모제의 주최자로 나선다. tvN 조연출 고 이한빛씨,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씨, 제주 고교 현장실습생 고 이민호군, 경기 군포 고교 현장실습생 고 김동균군, CJ 충북 진천 고교 현장실습생 고 김동준군, LGU+고객센터 전북 전주 고교 현장실습생 고 홍수연양, LGU+고객센터 고 이문수씨,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 경기 수원 건설노동자 고 김태규씨, 삼성전자 LCD 뇌종양 생존 피해자 한혜경씨. 10명의 이름을 가슴에 품은 가족들이다.

일러스트 김상민기자

일러스트 김상민기자

지난해 12월 김용균씨 죽음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 사는 산재 피해자 가족들이 모였다. 이들은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원청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을 벌였다. 현장실습생 제도를 개선하라는 목소리도 냈다. 최우선 과제는 안전한 일터 만들기. 그 다음은 억울하게 떠나보낸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이다.

추모는 당연한 일

김도현씨(29)는 지난 4월 10일 동생 태규씨를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건설노동자 태규씨는 5층 높이에 있던 화물용 승강기에서 추락했다. 이 현장에서 일한 지 사흘째였다. 승강기는 양쪽 문을 모두 열어둔 채 운행됐다. 태규씨는 안전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시공사는 일용직에겐 안전모와 안전화를 지급하지 않았다. 화물용 승강기에는 한 명만 탑승해야 하는 규정도 무시됐다.

이틀 전 작업복을 입은 채로 같이 ‘치맥’을 먹던 동생의 모습이 생생했다. 사고 현장 사람들의 진술이 엇갈렸다. ‘실족사’라는 경찰의 말도 믿기 힘들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필요했다. 준비 중이던 카페 개업은 접어뒀다. 동생이 떠난 지 2주 뒤 김씨는 국회 기자회견장에 섰다. 4개월 전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제2의 용균이는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외친 자리다. 이후 김미숙씨가 태규씨 가족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다시는’ 가족이 됐다.

“한해에 약 2400명이 산재로 죽는다는 걸 몰랐어요. 이때까진 평범하게만 살았거든요. 요즘은 친구들하고도 연락을 안 해요. 괜찮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자체가 힘들어요. ‘다시는’ 가족들은 먼저 아픔을 겪은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어떤지를 알고 계세요. 눈빛만 봐도, 아무 말 안 해도 편해요.”

여전히 가만히 있기는 힘들다. 김씨는 관할 경찰서와 노동청 앞에서 제대로 된 수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공사현장을 지날 때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은 노동자들을 보면 “안전모 쓰세요”라고 소리친다. 김씨는 “그렇게 소리치면 미친놈 보듯 쳐다본다”며 “노동부에 전화해서 위험한 현장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누구신데 신고를 하느냐’고 캐물을 뿐”이라고 했다.

‘다시는’ 가족들만은 김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얼마 전엔 김미숙씨와 함께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씨의 집에 다녀왔다. 외가에 온 느낌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이 PD를 추모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단다. “용균이, 민호 일하는 영상이나 한빛 PD의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요. 만난 적은 없지만요. 서로 있어주는 자체가 당연한 거고, 또 하나의 가족이니까요.”

2014년 1월 20일 이른 아침. CJ제일제당 진천 육가공 공장의 현장실습생이던 김동준군이 기숙사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그는 과로와 잇단 폭언, 폭력을 견디지 못했다. 회식 자리에서 2차를 가기 싫다고 했다가 선임에게 뺨을 맞은 적도 있다. 김군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너무 무섭다. 제정신으로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라고 남겼다. 어머니 강석경씨(51)에겐 울면서 회사에 복귀하기 싫다고 하는 아들을 달래 보낸 것이 한으로 남았다.

산재 피해자 유가족과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5월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위험의 외주화’ 관련 정부의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산재 피해자 유가족과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5월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위험의 외주화’ 관련 정부의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일상으로 돌아갈 순 없다

“뉴스에서 노동자 잘못으로 사고가 났다고 하면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희 아이에게 사고났을 때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걸 피부로 경험하게 된 거죠. ‘다시는’ 가족들이랑 얘기해보니 모두가 똑같이 느꼈더라고요. 그런데 왜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느냐는 생각에 모인 거예요. 작은 법령 하나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큰 힘이 들고, 그 모든 것에 기득권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요즘은 소설책이 재미가 없어요. 현실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니까요.”

2년 동안 집에서 밥을 해먹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아이를 생각하면 상을 차리기 힘들었다. 직장에서 동료들이 자식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아들이 남긴 기록으로 책을 펴내는 작업을 하면서 치유가 됐다. 지금은 ‘다시는’에서 위로를 받는다.

“저희들끼리 단체 카톡방에 무슨 일 있었는지 올리곤 해요. 각자 아이들의 기일이나 생일 소식도 올라오고요. 제주도, 강원도, 서울 다 떨어져 있어서 날마다 만나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힘들지 저절로 알잖아요. 아픔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이지만, 진짜 피를 나눈 내 가족보다 훨씬 더 가깝고 편안해요.”

각자 가슴에 새긴 이름은 다르다.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다. “방송노동자 이한빛 PD 추모제라고 하지만, 한빛이 추모를 하면서 동준이도 같이 추모를 하는 거죠. 한빛이도 내 아들이고, 민호도 아들이고 다 내 자식이라 생각합니다. 한빛이 한 사람의 추모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같이 가슴 아파하고 추모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족이잖아요.”

‘다시는’은 열려 있다. 일터를 안전하게 만들고 싶은 산재 피해가족이라면 누구든 맞을 준비가 돼 있다.

“자식 보내고 내 이야기를 떠들어가면서 들어달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다고 우리 가족이 다시 오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사람들은 왜 그러고 다니느냐고, 일상을 찾으라고 해요. 하지만 그 일상에 있어야 할 가장 큰 중심축이 사라졌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요. 굳이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내 가족 이야기를 하며 같이 울고 싶은 분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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