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스리그 ‘죽음의 조’라서 그냥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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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조 막차를 탄 체코 명문 슬라비아 프라하 관계자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토마스 시로바트카 슬라비아 프라하 부회장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만 웃는 장면은 중계방송을 통해 유럽을 넘어 세계 축구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토마스 시로바트카 슬라비아 프라하 부회장(가운데)이 8월 30일 프랑스 모나코의 그리말디 포럼에서 진행된 유럽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식에서 ‘죽음의 조’에 막차를 타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웃고 있다./ UEFA 홈페이지 중계화면

토마스 시로바트카 슬라비아 프라하 부회장(가운데)이 8월 30일 프랑스 모나코의 그리말디 포럼에서 진행된 유럽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식에서 ‘죽음의 조’에 막차를 타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웃고 있다./ UEFA 홈페이지 중계화면

사람은 행복할 때만 웃지 않는다. 슬프고 허탈한 일을 겪을 때 짓는 미소도 있다. 2019~2020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조 추첨식의 하이라이트가 그랬다. ‘별들의 잔치’로 불리는 챔피언스리그는 8월 30일 프랑스 모나코의 그리말디 포럼에서 열린 조 추첨을 통해 유럽 전역의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오른 32개팀의 운명을 갈랐다. UEFA는 지난 5년간 성적을 바탕으로 시드를 배정해 강팀과 약팀을 나누지만, 매번 강팀들이 한곳에 모이는 죽음의 조는 나온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F조가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스페인 강호인 FC바르셀로나가 먼저 시드인 1번 포트 자격으로 F조에 이름을 올리더니, 독일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2번 포트)와 이탈리아의 인터 밀란(3번 포트)이 순서대로 합류했다.

바르셀로나·도르트문트와 한 조

바르셀로나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아깝게 탈락했지만 앙투안 그리에즈만(28)과 프렝키 데용(22)을 영입해 더욱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다. 도르트문트도 제이든 산초(19)를 비롯해 마르코 로이스(30)와 파코 알카세르(26), 마츠 후멜스(31) 등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최근 약세였던 인터 밀란조차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새롭게 부임한 뒤 로멜루 루카쿠(26)와 디에고 고딘(33) 등을 영입해 전력을 끌어올렸다. 세 팀 모두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최소한 한 번씩은 들어올린 명문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챔피언스리그는 각 조에서 2개팀만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 후보인 세 팀 중 하나는 조별리그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너무 이른 시기에 만난 세 팀의 관계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런데 이날 조 추첨식의 주인공은 달랐다. 거꾸로 웃었다. 조 추첨식이 50여분 흘러갈 무렵 F조 막차를 탄 체코 명문 슬라비아 프라하 관계자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토마스 시로바트카 슬라비아 프라하 부회장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만 웃는 장면은 중계방송을 통해 유럽을 넘어 세계 축구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체념에 가까웠지만 넉넉한 풍채에 어울리는 그의 웃음은 최악의 상황을 잠시 잊기에 충분했다. 시로바트카 부회장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리 브르바와 다니엘 콘라드, 지리 뮬러 등과 함께한 것은 남은 인생에서 기억될 추억거리”라며 조 추첨식에서 자신들이 웃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챔피언스리그 ‘죽음의 조’라서 그냥 웃지요!

체코의 축구 영웅에게 발등 찍혀?

‘슬라비아 프라하의 불운이 더욱 화제가 된 것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결과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공교롭게도 체코가 자랑하는 골키퍼 페트르 체흐(현 첼시 디렉터)가 마지막 순서인 4번 포트의 조 추첨자로 나섰는데 그가 “체코의 축구 팬들에게 좋은 결과일 것”이라며 뽑은 게 하필이면 F조였다. 네 번째 추첨 대상이었던 슬라비아 프라하가 죽음의 조에 빠질 확률은 단 20%. 슬라비아 프라하 관계자들의 미소는 체흐가 지역 라이벌인 스파르타 프라하 출신이라 일부러 F조에 빠뜨렸다는 의심(?)을 감추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체흐는 “슬라비아 프라하가 16강 진출을 노릴 수는 없겠지만, 프라하에서 (우승 후보인) 세 팀을 볼 수 있는 것은 팬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냐”고 항변했다.

객관적인 전력을 감안하면 슬라비아 프라하가 강호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는 힘들다. 세계 최고의 골잡이로 군림하고 있는 리오넬 메시가 뛰는 바르셀로나는 현재 UEFA 클럽 랭킹 2위, 도르트문트는 13위, 인터 밀란은 46위다. 1892년 창단해 12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슬라비아 프라하는 지난 시즌 체코 포르투나리가에서 정상에 올랐지만 챔피언스리그 본선 출전 경험이 이번 시즌을 포함해 단 두 번이 전부라 UEFA 클럽 랭킹에선 105위에 머물고 있다.

챔피언스리그 본선 출전 단 2번

선수단 전력을 평가하는 또 다른 지표인 몸값 추정치에서도 비교가 힘들다. 바르셀로나는 선수단 전체의 몸값 추정치가 11억6000만 유로(약 1조5583억원), 도르트문트와 인터 밀란은 각각 6억4210만 유로(약 8626억원)와 5억8290만 유로(약 7831억원)에 달한다. 반면 1892년 창단해 12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슬라비아 프라하는 세 팀의 유명 선수 한 명의 몸값에도 못미치는 4060만 유로(약 545억원·이상 유럽 이적통계 전문사이트 트랜스퍼마크트 기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슬라비아 프라하 선수단은 죽음의 조에서 강호들을 상대로 기적을 꿈꾼다. 첫 도전이었던 2007~2008시즌 1승(2무3패)을 손에 넣었던 것을 이번에도 재현한다는 각오다. 16강 진출을 욕심낼 수는 없겠지만, 홈구장인 시노보 스타디움에서 강호들의 발목을 한 번이라도 잡는다면 팬들에게 할 말은 충분하다.

토마스 시로바트카 슬라비아 프라하 부회장이 유럽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식이 끝난 뒤 자신의 트위터에 웃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 토마스 트위터 캡쳐

토마스 시로바트카 슬라비아 프라하 부회장이 유럽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식이 끝난 뒤 자신의 트위터에 웃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 토마스 트위터 캡쳐

진드리치 트르피쇼프스키 슬라비아 프라하 감독(43)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엄연히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는 팀”이라고 말했고, 수비수 블라디미르 쿠팔(27)은 “강호들만 모인 죽음의 조에서 승점 1점만 따내도 금과 같은 가치가 있다. 바보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 3총사 예선에서 맞대결은 불발

유럽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에서 또 다른 관심사였던 국가대표 3총사의 맞대결은 아쉽게도 불발됐다.

손흥민(27·토트넘)을 비롯해 황희찬(22·잘츠부르크), 이강인(18·발렌시아)의 소속팀이 나란히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해 조별리그부터 진검 승부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추첨 결과 모두 흩어져 배치된 것이다. 최소한 한국 선수들의 맞대결은 조별리그를 통과해 16강부터 진행되는 토너먼트부터 가능한 그림이 됐다.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오르려면 최소 조 2위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 기상도에선 희비가 엇갈렸다.

지난 시즌 아깝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그친 손흥민의 토트넘은 바이에른 뮌헨(독일), 올림피아코스(그리스),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세르비아)와 B조에 속했다. 토트넘은 뮌헨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팀들을 만난 터라 이변이 없는 이상 16강 진출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다. 손흥민에게 뮌헨은 익숙한 팀이라는 강점도 있다. 과거 독일 분데스리가를 누비던 시절부터 자주 맞대결을 펼쳤고, 올해 프리시즌 아우디컵에선 승부차기로 꺾고 우승까지 맛봤다. 손흥민은 “뮌헨을 상대로 뛰는 게 즐겁다”며 “우리는 지난 시즌을 기억해 우리가 했던 것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강인이 뛰는 발렌시아는 첼시(잉글랜드), 아약스(네덜란드), LOSC 릴(프랑스)과 함께 H조에 묶였다. 전통의 강호인 첼시와 지난 시즌 깜짝 4강에 올랐던 아약스가 눈에 띄지만 특출난 강호는 없어 물고 물리는 양상이 예상된다. 발렌시아는 올여름 구단주와 단장, 감독 간의 갈등으로 불안한 첫출발에 나선 터라 얼마나 분위기를 잘 다독이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수 있다. 아직 발렌시아에선 주축 선수보다 유망주로 분류되고 있는 이강인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와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출전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올여름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황희찬은 16강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잘츠부르크는 리버풀(잉글랜드), 나폴리(이탈리아), 헹크(벨기에)와 함께 E조에 편성되면서 F조에 버금가는 죽음의 조에 갇혔다는 평가가 나왔다. 리버풀은 챔피언스리그 디펜딩 챔피언이다. 선수 변화 폭이 거의 없는 가운데 지난 시즌 막강한 전력에 조직력의 짜임새를 더했다. 이탈리아 세리에A 2위인 나폴리 또한 경험이 풍부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지휘 아래 16강 진출을 노린다. 그나마 벨기에 헹크가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경험이 세 번이 전부인 약체라지만 잘츠부르크 역시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복귀한 것은 1994~1995시즌 이후 처음이다. 다행히 황희찬은 강호들과 만난 것에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시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6경기에서 4골·6도움을 쏟아내 도움과 공격포인트 부문에서 모두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그는 “강한 팀과 경기를 하는 것을 즐긴다. 당연히 이긴다는 목표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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