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감정적 맞불은 오히려 화 불러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지나친 전면전 부작용 초래…노동환경 해치는 친기업 정책도 우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공언대로였다. 8월 7일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배제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공포했다. A그룹(백색국가)에 속해 있던 한국은 B그룹으로 한 단계 강등됐다. 8월 28일부터 한국은 일본의 비백색국가다.

AP Photo/Lee Jin-man

AP Photo/Lee Jin-man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방어적 자세’를 견지하던 대응노선을 ‘수평적 자세’로 수정했다.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것도 수평 전략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일본 산업계에 타격을 줄 대(對)일본 수출규제 카드를 꺼낼 참이다.

수평을 지향하는 정부의 대외전략과 달리 내수용 대응책은 ‘수직 강하’ 방식으로 이뤄진다. 산업 안전조치 간소화를 비롯해 장시간 연장근로 허용, 화학물질 관련 규제 완화 등 노동·환경 안전망을 허무는 대응책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경제 ‘침략’이 되고 분쟁이 ‘전쟁’으로 불리는 사이 물밑에서는 ‘300인 미만 사업장 주 52시간 상한제 적용 유예’와 ‘고소득 전문직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등 친기업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 ‘한시적’이라고 조건을 달았던 화학물질등록평가법(화평법)·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에 대한 규제완화 조치는 법 개정 절차를 밟게 됐다.

‘불확실성’ 커진 한국 산업계

강도 높은 친기업 드라이브에 노동계는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는 비상시국임을 내세워 맞서고 있다. 정치권의 반일(反日) 공세는 정부의 친기업 행보에 힘을 보탠다. 짙어진 반일 여론 탓에 노동계의 반발은 전시체제에 벌이는 반국가적 행위로 치부되고 만다. 일본발 경제위기와 반일 여론이 사회안전망과 노동자의 기본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조치로 기존 3개 소재·부품 외에 추가적으로 개별허가를 받아야 할 품목은 없다. 일본 정부가 특별일반포괄허가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자율준수(ICP) 기업의 경우 특별일반포괄허가를 받아 수출심사와 허가를 면제받을 수 있다. 일종의 포괄 허가인 셈이다. 다만 특별일반포괄허가를 받지 못한 일본 기업과 거래하는 국내 중소기업들은 개별허가를 받아야 한다.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가면서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됐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일본 정부는 이번 조치를 통해 한국 산업계에 ‘불확실성’의 덫을 놓았다. 포괄허가취급요령 개정과정을 거쳐 언제든 한국을 상대로 추가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이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일본발 불확실성을 떠안게 된 한국 정부는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키로 했다. 일본과 수평적 자세로 사안을 다투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대응책이다. 남시훈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이번 화이트리스트 제외는 본격적인 일본의 도발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맞대응으로 보인다”며 “어떤 나라가 국제 통상질서를 어지럽힐 경우 맞대응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수평적 자세에 따른 맞대응과 달리 민주당은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를 필두로 연일 강경대응책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 거론되는 일본 관련 대응책은 반일 색채가 짙고 수위도 높다. “히틀러를 보면서 아베를 떠올렸다. (한국 정부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도쿄올림픽에 대한 국제적 민간 불매운동이 전개될 것”(8월 5일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언급까지 나왔다. 같은 날 일본경제침략특위 위원장인 민주당 최재성 의원은 도쿄를 포함한 일본여행 규제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하 지소미아) 파기와 2020년 도쿄올림픽 보이콧 검토 역시 민주당에서 추진 중인 강경대응책들이다.

지소미아 파기, 찬성이 반대보다 높아

당장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과도한 조치’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여권은 국민 여론을 이유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실제로 지소미아 파기의 경우 여론조사 결과 파기에 대한 찬성 여론이 반대 여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리얼미터가 오마이뉴스 의뢰로 지난 8월 6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지소미아 파기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47.7%로 반대한다는 응답 39.3%보다 높았다.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중구청 관계자가 ‘노(보이콧) 재팬’ :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중구청 관계자가 ‘노(보이콧) 재팬’ :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소미아 파기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사안으로 본다. 지소미아를 연장하더라도 협정 특성상 원하지 않는 정보는 공유할 필요가 없는 데다 실질적인 군사교류를 중단하면 문제될 게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히려 한국 정부에서 서둘러 협정 파기론을 꺼냈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입장을 선회할 경우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지소미아를 일본 수출규제와 결부시켜 대응카드로 쓰는 건 상당히 우려스럽다”며 “실제 유용성 여부를 떠나 정부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지소미아를 백색국가 제외를 이유로 파기하는 건 옳지 않다”며 “지소미아는 그 자체로 독립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돌출발언’ 형식으로 내놓은 강경대응책은 쉽게 국회 문턱을 넘는다. 민주당에서 운을 떼면 정부 부처에서 받아 추진하는 모양새다. 외교부는 민주당의 일본여행 규제 요구와 관련해 일본 여행경보조치 검토에 나섰다. 당초 지소미아 연장 원칙을 밝혔던 국방부도 협정 파기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뒀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지난 8월 5일 국회에서 “협정을 연장하는 것으로 검토하고 있었는데, 최근 일본과 신뢰가 결여됐고 수출규제나 화이트리스트 배제와도 연계돼 있어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반일 여론전에 참전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한국 제외조치가 발표되자 관내 게양한 일장기를 걷었고 서대문구청에서는 직원 400명이 참석해 일본 경제보복조치 규탄대회를 열었다. 중구는 관내에 ‘노 재팬’ 배너기를 내걸었다가 시민 비판 속에 철회하기도 했다. 당초 서양호 중구청장은 비판여론이 일자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지금은 경제판 임진왜란이 터져서 대통령조차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고 국회에서는 지소미아 파기가 거론되고 있는 비상한 때”라며 “관군·의병 따질 상황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불매운동 지자체 개입하면 문제 소지

하지만 지자체의 주도로 이뤄진 일본 불매운동은 양국이 체결한 투자보장협정(BIT) 위반 소지가 있다. 협정상 지자체의 행위는 정부가 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 일반 시민들의 소비활동에 직접 관여한 셈이다. 일본 불매운동을 지시한 법령이나 구체적인 조치가 없더라도 세계무역기구(WTO) 협약상 내국민 대우 위반, 최혜국 대우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소비자의 자발적인 불매는 무역규범 차원에서 문제가 없지만 지자체가 개입하면 협정 위반에 해당한다”며 “결과적으로 지자체의 이류 포퓰리즘이 일본에 공격할 빌미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체를 비롯한 정치권이 나서 조성한 대(對)일본 전시체제 속에서 노동·환경 안전망은 쉽게 해체된다. 정치권에서 반일 공세 수위를 높여 위기의식을 고취시키면 정부가 나서 빗장을 푸는 방식이다. 8월 5일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정부세종청사에서 연 브리핑에서 “급하게 해외 품목을 수입해야 하는 경우 산업 안전과 관련해 필요한 절차가 있다”며 “(안전) 절차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빠르게 해서 대응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장시간 연장근로 허용(주 52시간 이상 근무제)과 화학물질 관련 규제(화평법·화관법) 완화 역시 일본 수출규제를 사회적 재난으로 간주해 내놓은 조치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노동계는 산업안전 절차 간소화를 비롯한 연장근로 허용 등 일련의 조치가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할 것으로 우려한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노동자의 건강과 직결된 연장근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이뤄져야 할 조치”라며 “하지만 정부는 반일 정서와 위기감을 악용해 노동자 삶에 영향을 미치는 법과 제도를 쉽게 개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R&D(연구개발) 특별연장근로 인가 방침의 경우 반도체 현장노동자뿐 아니라 연구인력 구조의 하부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이다. 대학 연구소에서 실험을 담당하는 대학원생,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있는 학생연구원 등 사실상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연구인력의 노동환경은 이번 조치로 더욱 악화됐다. 신정욱 전국대학원생 노조 사무국장은 8월 7일 열린 한·일관계 관련 긴급 정세토론회에서 “정식 연구원의 노동시간이 늘면 실제 실험을 해야 하는 학생들의 노동시간은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어난다”며 “R&D 인력 구조에서 최하위에 있는 실험인력에 대한 논의는 정부 대책에서 배제됐다”고 말했다.

노동계의 우려 속에도 정부·여당은 사회안전망과 노동자의 기본권을 흔드는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논평(<창작과 비평>)을 통해 “정부의 대응은 하청업체와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집중돼야 하지만 이번 대책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은 보이지 않는다”며 “여권과 재벌은 이번 한·일 무역분쟁을 호재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무역분쟁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이 사태를 절대 호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