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 소녀상 전시 중단이 ‘폭거’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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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부자유전·그 후’는 그간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를 거부당한 작품들을 모아 ‘표현의 자유’를 논의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하지만 주최자 스스로 일본 보수·우익의 협박에 ‘오케이’ 신호를 준 것이다.

지난 8월 1일 일본 아이치현에서 개막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서 한 일본 시민이 ‘평화의 소녀상’을 살펴보고 있다. / 나고야|김진우특파원

지난 8월 1일 일본 아이치현에서 개막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서 한 일본 시민이 ‘평화의 소녀상’을 살펴보고 있다. / 나고야|김진우특파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소녀상)이 일본 최대 국제예술제에 선보인 지 사흘 만에 전시가 중단됐다. 항의·협박전화가 쇄도해 주최 측이 안전상 이유로 소녀상이 출품된 기획전을 중지시켰다. 전시를 방해하려는 우익과 일본 정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전례를 만든 것이다. 전시 기획자·작가들은 “역사적 폭거”라고 강력 반발했고, “표현의 자유 침해” 등 비판론도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일본 사회의 현 주소를 확인시켰다는 평가다.

항의·협박에 전시 3일 만에 중단 항의·협박에 전시 3일 만에 중단 김운성·김서경 부부 작가가 공동제작한 소녀상은 지난 8월 1일 일본 아이치현에서 개막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서 전시됐다. 나고야시 아이치예술문화센터에서 진행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 출품됐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2010년부터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일본 최대 규모의 국제예술제다. 2016년에는 60만명이 찾았다. 소녀상이 온전한 모습으로 일본 공공미술관에 전시된 건 처음이다.

소녀상은 2012년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린 국제교류전에 축소 모형으로 전시됐지만, ‘정치적 표현물’이라는 이유로 나흘 만에 철거된 바 있다.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는 그간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를 거부당한 작품들을 모아 ‘표현의 자유’를 논의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소녀상 외에도 안세홍 작가의 위안부 피해자 사진, 강제연행희생자 추도비를 소재로 한 조형작품, ‘천황제’나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를 다룬 작품 등 17점이 전시됐다. 쓰다 다이스케 트리엔날레 예술감독은 “미술에서 특정 표현을 하기 어려워진 일본의 상황을 문제제기하고 싶었다”면서 우익의 항의 등을 대비해 변호사, 경찰 등과 상담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최 측은 전시 사흘 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실행위원장인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8월 3일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전시를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테러 예고나 협박전화 등도 있고, ‘가솔린통을 들고 가겠다’는 팩스도 들어왔다”며 “안심하고 즐겁게 감상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해 이런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쓰다 예술감독도 항의전화 쇄도로 직원들이 피폐해지는 것을 더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주최 측은 8월 4일 전시장 입구를 가설벽으로 막고 경비인력을 배치했다. 트리엔날레는 10월 14일까지지만, 소녀상 전시는 사흘 만에 중단된 것이다.

일본 정부·정치인들 공격 선동 이번 사태는 일본 정부와 우익성향 정치인들이 전시를 문제삼으면서 촉발된 부분이 크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8월 2일 “보조금 결정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정밀히 조사한 뒤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정부 보조금을 고리로 소녀상을 전시하게 된 배경과 과정 등을 따져 주최 측을 압박하겠다는 뜻이다.

일본 시민들이 8월 4일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아이치예술문화센터 앞에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의 전시 중단에 항의하며 전시 재개를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 나고야|연합뉴스

일본 시민들이 8월 4일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아이치예술문화센터 앞에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의 전시 중단에 항의하며 전시 재개를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 나고야|연합뉴스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같은 날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일”이라면서 전시 중지를 요청했다. “강제연행 증거는 없다”는 망언도 했다. 가와무라 시장은 2007년 일본 보수 국회의원·언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위안부가 된 것을 나타내는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전면광고를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냈을 때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는 2012년 중국공산당 난징시위원회 방일단에 “난징사건(난징대학살)은 없었던 것 아닌가”라고 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발언들은 우익들의 항의·협박에 브레이크를 걸기는커녕 사실상 ‘오케이’ 신호를 준 것이다. 오카노 야요 도시샤대 교수는 <도쿄신문>에 “전시를 공격해도 좋다고 보증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 보수·우익들은 지금까지 집요하게 소녀상을 공격해 왔다.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소녀상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을 때 일본 극우단체는 철거 소송을 냈다. 지난해 12월에는 필리핀에서 소녀상이 설치됐다가 일본 정부 압력으로 이틀 만에 철거됐다. 독일 베를린의 여성 예술가 전시관 ‘게독’이 지난 8월 2일 시작한 전시회에 소녀상이 출품되자 주독 일본대사관은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공문을 보내 압박했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책임 외면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전시 기획자들은 물론 트리엔날레 참가 작가들도 성명을 내는 등 비판론이 커지고 있다.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실행위원들은 8월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표현의 부자유’ 상황을 생각하자는 기획을 주최자가 스스로 탄압하는 것은 역사적 폭거”라며 “전후 일본 최대의 검열사건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6일 “중지 결정을 납득 못한다”며 전시 재개를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아이치현 지사에 제출했다.

예술가들도 ‘연대’를 표명했다. 트리엔날레에 참가한 예술가 72명은 6일 연대성명을 통해 “우리들이 참가하는 전시회에 정치적 개입과 협박마저 행해지는 데 깊은 우려를 느낀다”며 “정치적 압력이나 협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제의 회복과 계속, 안전이 담보된 자유롭고 활발한 논의의 장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일본 펜클럽도 성명을 내고 “동감이든 반발이든 창작과 감상 사이에 의사를 소통하는 공간이 없으면 예술의 의의를 잃어버려 사회의 추진력인 자유의 기풍도 위축시켜 버린다”면서 “전시는 계속돼야 한다”고 밝혔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도쿄신문> 등 리버럴 성향의 일본 신문들은 일제히 사설을 통해 이번 사태를 비판했다. <마이니치>는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언론이나 표현을 테러 같은 폭력으로 배제하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며 “이런 풍조가 사회에 만연하는 데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를 ‘표현의 자유’ 문제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헤이트스피치(증오·혐오 표현) 문제에 몰두해온 간바라 하지메 변호사는 페이스북에 “본질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로 대표되는 ‘역사의 진실’, ‘일본인이 마주해야 할 전쟁 책임’의 문제가 우익 폭력으로 봉쇄된 것”이라며 “이번 일로 ‘일본인은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정의를 행하지 못하는 민족’이란 걸 세계에 보여줬다”고 밝혔다.

<김진우 도쿄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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