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가 좋아’ LP 음반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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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음반 전시장. 턴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매장 방문객들이 빙빙 돌아가는 LP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바로 옆 진열장에 청음을 위해 시대별로 분류된 음반들을 손으로 훑어가다 보면 각양각색의 그림으로 장식된 정사각형의 음반 겉표지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문다. 음반 하나를 골라 카운터에서 대여절차를 밟은 뒤 턴테이블 위에 걸자 예의 익숙한 LP 음색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다만 바늘이 음반을 따라 흐르며 들리던 미세한 잡음은 과거보다 더 희미해지고 음색은 더 또렷해졌다.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이곳 ‘뮤직 라이브러리’와 바로 옆 ‘바이닐 앤 플라스틱’ 전시장에서는 음악을 넘어 취미생활 전반에 관련된 이와 같은 복고 아이템들도 함께 볼 수 있다.

LP 음반 생산업체인 마장뮤직앤픽처스 엔지니어가 제작한 LP 음반을 검수하고 있다. / 마장뮤직앤픽처스 제공

LP 음반 생산업체인 마장뮤직앤픽처스 엔지니어가 제작한 LP 음반을 검수하고 있다. / 마장뮤직앤픽처스 제공

정태춘·박은옥, 김창완밴드 등 LP 발매

‘폴라로이드’라는 상표명이 일반명사가 된 즉석인화사진기를 비롯해 타자기, 카세트 테이프와 재생기기까지,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뉴트로(new+retro)’라 불리는 새로운 복고 감성 상품들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LP의 위상은 단연 독보적이다. 단지 추억에만 머물지 않고 기술의 발달과 함께 더욱 주목받는 아날로그 기반 품목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음원만 판매하거나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하며 실제 음반을 찍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LP만은 예외다. 정태춘·박은옥, 김창완밴드, 김광석, 조동진 등의 ‘레전드’급 대중음악인 외에도 아이유나 에픽하이, 그리고 아이돌 그룹의 한정판 음반까지 LP로 발매하는 경우는 오히려 더 늘고 있다. 인터넷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지난해 11~12월 LP 음반과 턴테이블 거래액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28% 늘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의 ‘글로벌 뮤직 리포트 2018’을 보면 세계적으로도 LP의 인기는 지속되고 있어 2017년 기준 전년 대비 22.3% 수익이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녹음부터 재생까지 모든 과정에서 디지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현실에서 LP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 발달과 맞닿아 있다. “과거와 달리 요즘의 음악 녹음은 대부분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사실 고성능의 음향장비로 듣는다면 같은 음원을 디지털기기로 재생했는지 LP 턴테이블로 재생했는지 구분하기란 어려워요.” LP 음반을 생산하는 마장뮤직앤픽처스 관계자는 음질의 차이가 큰 의미가 없어진 시대가 오면서 LP만의 아날로그 음색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회사에서 나오는 음반 중 복각판과 신보의 비율이 6대 4 정도”라며 “단순히 LP에 추억을 가진 연령층 때문에 시장이 커진 것이라기보다는 젊은 층에서도 LP 음반을 내는 뮤지션들에게 큰 호응을 보내기 때문에 신보를 LP로 찍는 경우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굳이 따지면 LP 역시 처음에는 신기술의 집약체로 탄생했다. 1948년 미국 컬럼비아사가 처음으로 개발한 LP를 시연할 때까지 널리 쓰이던 SP(Standard Playing Record)는 한 면에 길어야 3~4분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다. LP(Long Playing Record)라는 이름은 초기부터 면당 22분을 넘길 정도로 재생시간이 길다는 뜻에서 붙었다. 현재는 해외에서 보편화됨에 따라 국내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바이닐(vinyl)’이란 이름은 LP를 만드는 소재인 폴리염화비닐(PVC)에서 유래한 것이다.

LP의 등장으로 긴 재생시간이 필요한 교향곡이나 오페라 등을 한 장의 음반에 담을 수 있게 된 클래식 음악계는 물론이고 3~4분가량의 짧은 싱글 곡 위주로 음반을 냈던 대중음악계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한 음반에 여러 곡을 담는 정규 앨범이라는 개념이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는 다시 MP3로 대표되는 디지털 음원의 등장으로 또 한 번 나타났다. 한 곡 단위로 구매하고 듣는 문화는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대세로 자리잡았다. 과거부터 있던 소수의 애호가들을 제외하면 LP가 부활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지난해 11~12월 거래액 128% 늘어

“젊은 손님들도 ‘스마트폰으로 들으면 뭔가 남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들고, LP판을 만져보고 사야 진짜 뭔가를 샀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고.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만져보면서 고르는 기분도 있으니까.” 서울 중구 황학동의 중고 LP 상가에서 만난 점주 김모씨(55)는 최근 이곳까지 음반을 찾으러 오는 젊은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1970~80년대 팝음악이나 국내 대중음악 음반,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는 클래식 음반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게를 찾는 얼굴들이 점차 젊어지고 있다. 젊은 층의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마포구 홍대 주변에서 레코드숍을 열고 있는 점주들의 말도 비슷하다. “중고 LP면 음질이 좋다고 하긴 어렵고, 지금의 20대들이 어렸을 적 들었던 추억의 음색이라고 하기도 힘들죠. 결국 흔히 쓰는 말로 ‘갬성(감성)’ 때문에 찾는 것 같아요.” 레코드가게 주인 최모씨(40)의 말이다.

LP를 생산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음질이 저하되는 문제는 최소화하면서 아날로그 고유의 음색을 살린 점 못지않게 ‘가성비 좋은’ 보급형 턴테이블이 출시된 점도 LP가 인기를 모으게 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아날로그적 복고 ‘감성’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소비시장의 흐름이 바뀐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큰 부피를 차지하며 자리잡고 있던 ‘전축’이 사라진 이후 쓸 만한 기능을 갖춘 턴테이블을 국내에서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국내 수입된 제품의 폭이 좁고 가격도 비싸 소수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해외직구까지 해가며 턴테이블을 샀다. 하지만 지금은 LP에 입문하기에 부담없는 가격으로 기존에 쓰고 있던 스피커나 헤드폰과 바로 연결할 수 있는 보급형 턴테이블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왕이면 음질도 좋을수록 좋긴 하겠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면 돼요. 바이닐(LP)이 CD나 카세트와도 다른 게 특유의 음색도 있지만 음반을 찾아 턴테이블에 올린 뒤 톤암을 잡고 바늘을 올려놓는 그 과정 자체가 매력이니까.” 한남동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만난 대학생 임호빈씨(24)는 달리 보면 번거롭다고도 할 수 있는 재생과정 자체가 LP만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지난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20대층의 큰 관심을 모은 ‘퀸’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 뮤지션들의 유산을 직접 만지고 소장·수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임씨는 “딱히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지만 (음반을) 소장하면 수십 년 뒤 더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뿌듯해지는 느낌도 든다”고 덧붙였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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