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주무르는 멕시코 암로 대통령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이민자 문제 해결에 양국이 공동으로 직면한 현실, 원인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조하면서 트럼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멕시코에 협조하도록 만들고 있다.

“화를 돋우지 마라. 그렇다고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일자리 투자에 끌어들여 이민을 막아라.”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에서 정례 기자회견 도중 질문할 기자를 지목하고 있다./ 멕시코시티|EPA연합뉴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에서 정례 기자회견 도중 질문할 기자를 지목하고 있다./ 멕시코시티|EPA연합뉴스

힘으로 상대 국가를 밀어붙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대하는 멕시코 새 정부의 전략이다.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할 수 없다면 미국에 위협적인 중국을 불러들이게 한다. 미국 국경수비대에 가로막혀 멕시코에 체류하고 있는 중미국가 출신 이민자 행렬 ‘캐러밴’ 수천 명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멕시코 정부가 이 같은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17일 <뉴욕타임스>가 멕시코 관료들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미국과의 관계 설정, 중국을 지렛대로

좌파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보이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암로) 멕시코 대통령이 예상과 달리 갈수록 협상가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친미 아니면 반미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멕시코의 외교노선에 선택지 하나를 더했다.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이민자 문제 해결에 양국이 공동으로 직면한 현실, 원인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조하면서 트럼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멕시코에 협조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이 양국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주목된다.

멕시코가 내놓은 해결책은 ‘마셜 플랜’의 라틴아메리칸 버전으로 불린다. 미국은 막대한 돈을 투입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살렸다.

중미국가들과 멕시코 남부에도 돈을 풀어 일자리를 만들고 이 지역 치안력을 강화해 캐러밴의 근본원인을 없애버리자는 계획이다. 멕시코 정부는 미국이 이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중국을 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덩컨 우드 우드로윌슨센터 멕시코 연구소장은 <뉴욕타임스>에 “멀리 떨어진 중국은 남미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데 코앞에 있는 미국은 지갑을 닫으면서 이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구도는 오랫동안 지속됐다”며 “트럼프와 암로 대통령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중국이 얼마나 중미국가에 투자할 의지가 강한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면서 영향력을 높여 왔다.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수로와 육로로 잇는 일대일로 구상에 따른 것이다. 중국은 투자국가들에 대만과 단교를 압박하기도 하는 등 미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앞마당 국가로 불렸던 멕시코와 과테말라 등 중미국가들이 중국에 더욱 밀착한다면 미국으로서는 패권전략에 차질이 생기는 셈이다.

암로는 부패와의 전쟁, 경제적 불평등 감소 관련 공약을 다수 내걸어 대통령에 당선돼 지난 1일 취임했다. 국내 문제에 초점을 맞췄지만 그의 당선으로 멕시코 정부의 대외정책, 특히 미국과의 관계 설정은 큰 변화가 예고됐다. 암로 비판 진영에서는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규정짓거나, 다른 좌파 라틴아메리카국 독재자들의 동료 정도로 평가절하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암로 대통령이 여러 모로 전임자들과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가 미국과의 관계 설정을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다른 나라들과 복잡한 관계로 얽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암로는 외교정책과 관련해서는 이데올로그보다는 실용주의자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멕시코 암로 대통령의 협상가 본색

멕시코는 최대 교역국인 미국과 관계를 잘 가져가야만 한다. 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멕시코의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됐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도 늘었다. 멕시코 시민의 10% 이상이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멕시코가 미국 내에서 운영하는 영사관만 50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 워싱턴|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 워싱턴|AP연합뉴스

양국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도 늘었다. 마약 카르텔 소탕 문제가 대표적이다. 이들 조직의 미국 내 마약 판매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마약 조직 간 이권다툼에서 파생된 살인범죄 등 강력범죄 발생률이 해마다 증가한다. 양국은 2006년부터 마약 카르텔 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양국은 중미 이민자 문제, 베네수엘라의 정정불안으로 야기되는 위협에도 공동대처하고 있다. 멕시코는 테러 위협과 관련해 미국과 정보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의견에 동조하며 힘을 실어주는 중이다.

암로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해 미국에 줄 것은 주면서 확실한 보상을 받으려 한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트럼프의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계획을 강도 높게 비난했던 암로는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에 공세적인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암로는 대선 당시 NAFTA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도 선회했다. 지난 10월 북미 3개국은 NAFTA를 대체하는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에 합의했다. 암로의 암묵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암로 정부는 이민자 문제 해결에 있어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캐러밴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양국 관료들의 말을 인용해 캐러밴의 미국 망명신청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을 멕시코에 머무르게 하는 내용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암로 정부는 직후 성명을 내 “어떤 종류의 합의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암로 대통령 취임 이후인 지난 18일 트럼프 정부는 캐러밴 문제의 근본원인을 차단하기 위해 캐러밴 시작점 국가에 106억 달러(약 12조원) 상당의 개발원조를 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 자국민들 행렬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며 원조 중단 위협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반전인 셈이다. 미국 정부는 또 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한 멕시코 남부에 개발원조 총액의 약 절반인 48억 달러를 투입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미국의 개발원조 자금이 투입되는 멕시코 치아파스·오악사카·타바스코주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빈곤지역이자 과테말라·온두라스 등 이웃 국가 이민자들이 많이 일하는 곳이다. 미국의 지원으로 암로 대통령은 남부 저개발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이뤄내겠다는 대선 공약을 더 잘 이행할 수 있게 됐다. 암로는 남부지역 개발의 일환으로 관광업 활성화를 내걸며 마야문명 지역인 유카탄반도에서 치아파스주에 이르는 철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당분간 멕 시코와 미국의 관계는 훈풍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박효재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