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 사태 1년, 표류하는 해양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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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그라든 국적 선사 점유율… 중국·일본 등 외국 선사들이 나눠 가져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리고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선사였던 한진해운은 회생 문턱을 넘지 못하고 지난 2월 끝내 파산했다. 이후 대한민국 해운업은 해상물류 강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1년 넘게 변방에서 표류를 계속하고 있다. 1년새 국적 선사의 점유율은 쪼그라들었다. 사라진 점유율은 외국 선사들이 나눠 가졌고, 국내 해운업의 경쟁력을 조속히 회복하겠다던 정부의 청사진은 빛이 바랜 지 오래다.

미 해운분석기관 피어스데이터 등에 따르면 올 상반기 현대상선은 한진해운의 북미 항로 물량 5분의 1가량을 확보했다. 현대상선만 놓고 보면 선전한 결과지만, 외국 선사들의 약진이 도드라졌다.

법원이 한진해운의 파산선고를 내린 2월 17일 당시 한진해운이 모항으로 사용했던 부산신항 한진해운 터미널의 자동화 크레인이 멈춰서 있다. / 연합뉴스

법원이 한진해운의 파산선고를 내린 2월 17일 당시 한진해운이 모항으로 사용했던 부산신항 한진해운 터미널의 자동화 크레인이 멈춰서 있다. / 연합뉴스

현대상선 선복량 세계 15위에 그쳐

지난 6월 우리나라의 북미 노선 점유율은 5.7%(현대상선)로 지난해 6월 10.9%(한진해운 7.1%, 현대상선 3.8%)보다 5.1%포인트 급감했다. 한진해운이 가지고 있던 물량 일부를 흡수하면서 현대상선의 점유율은 높아졌지만, 줄어든 5.1%포인트는 중국의 코스코, 일본 선사 연합체인 오션네트워크익스프레스 등 외국 경쟁 선사들이 모두 나눠 가졌다.

지난해 해운산업 구조조정을 총괄했던 금융위원회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신청 직후 선박과 네트워크, 인력 등 핵심 자산을 현대상선 등에 넘겨주고 경쟁력을 최대한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다.

금융위의 장담과는 달리 당장 국내 선사들의 경쟁력은 아직 턱없이 낮다. 국내 1위 선사인 현대상선은 선복량이 34만6297TEU(1TEU는 6m짜리 컨테이너 1개)로 세계 15위(점유율 1.6%)에 그치고 있다. 국적 원양선사 선복량은 지난해 8월 105만TEU(한진해운, 현대상선)에서 1년 만인 올 8월 39만TEU(현대상선, SM상선)로 62%나 급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이 한진해운을 구조조정하면서 핵심 자산을 국내 경쟁 선사에 이식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핵심인 무형자산, 즉 네트워크를 외국 선사들에 다 빼앗긴 영향이 컸다고 입을 모은다.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상 운송라인을 1개 신규로 만드는 데 선박과 네트워크 구축 비용만 1조원이 넘게 들어가는데 네트워크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게 뼈아프다”고 말했다.

한진해운은 법정관리 전까지 북미 20개를 비롯해 아시아 30개, 유럽 13개, 호주 4개, 남미 3개, 대서양 1개 등 총 71개의 노선을 운영했다. 이 가운데 미주·아시아 노선은 SM상선에 인수됐지만, 유럽 노선 등은 청산됐다. 한진해운 국내외 전용 터미널의 경우도 현대상선과 SM상선이 10곳을 나눠 인수했지만 알짜로 꼽히는 미국 롱비치터미널은 스위스의 MSC 손에 넘어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각에서 정부가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전략적 고민 없이 성급한 결정을 내리면서, 애초부터 대안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다른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상물류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각국에서 전략적으로 해운업계에 투자와 지원을 집중하던 때 우리는 구체적인 그림도 없이 해체작업을 서둘렀다”면서 “불과 일주일 뒤의 물류대란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한진 사태 1년, 표류하는 해양강국

실제로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직후, 다수의 선박이 압류되거나 공해상에서 발이 묶였고 이 때문에 수출물량 납기를 맞추지 못해 추가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거나 신용에 타격을 입은 업체들이 속출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20일 만에 무역협회와 코트라(KOTRA)에 접수된 한진해운 사태 관련 피해사례는 총 604건으로 피해규모는 1억4700만 달러에 달했다.

한국 해운산업이 한진해운 법정관리에 몸살을 앓은 것과 달리 글로벌 강자들은 합종연횡으로 속속 덩치를 키우며 규모의 경제와 경쟁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머스크는 독일 함부르크 쥐트를 40억 달러에 인수했고, 일본 3대 선사인 NYK(니폰유센), K라인(가와사키기센), MOL(미쓰이OSK)은 컨테이너 부문을 합쳤다. 프랑스 CMA-CGM은 싱가포르 선사 넵튠오리엔트 라인을 25억 달러에 인수했다. 중국 최대 국영 해운사인 코스코는 홍콩 OOCL을 인수하면서 머스크, MSC에 이어 세계 3위 선사로 성장했다.

정부, 한국해양진흥공사 설립 계획

국내 해운업계는 합종연횡을 통한 협업체계 구축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 다단계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린 외국 선사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이달 초에는 현대상선·고려해운·SM상선·흥아해운 등 국내 원양선사 14곳이 모여 한국해운연합도 결성했다. 당장 외국 선사들과의 경쟁은 무리지만 동맹체를 결성해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은 자제하자는 취지다.

한진해운 파산의 그림자는 해운업뿐만 아니라 산업계 곳곳에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장 국내 화주들은 한진해운의 파산으로 국적 선사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더 비싼 운임을 주고 해외 선사를 이용해야 하는 일이 늘었다. 당장 지난 6월 기준 부산항에서 국적 해운사의 물동량 점유율은 1년 전 38.1%에서 34.2%로 줄어든 반면, 외국 선사 점유율은 61.9%에서 65.8%로 늘어났다.

정부는 장기 표류 중인 해운업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한국해양진흥공사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내년 6월 출범하는 한국해양진흥공사는 납입자본금 3조1000억원을 시작으로 필요하면 추가 출자해 자본금을 확충할 방침이다. 주요 업무는 금융지원과 정책지원 두 가지다. 금융지원은 선박투자 보증과 항만터미널 물류시설 등 자산투자 참여, 중고선박 인수 후 재용선 등이다. 해운거래 지원을 위해 시황 정보를 제공하고 노후선박 교체 등을 정책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한국해양진흥공사 설립은 해운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담은 것”이라며 “공사가 해운업 재건의 발판이자 글로벌 해양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진회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해운산업연구실장은 “한진사태를 겪고 정부·여야에서 한목소리로 기간산업으로서의 해운업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했지만 지금까지 나온 지원정책 등을 보면 한진사태 이후에도 해운업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 내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면서 “한진사태 이전으로 경쟁력을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투자가 불가피한 만큼 지금이라도 해운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재정·금융·해양 등 부처 간 공감대부터 형성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준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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