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및 가뭄이 가난과 맞닥뜨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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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등 아프리카 동부는 최근 3~4년 내내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다. 가뭄으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동물이 먹을 풀도 사라졌다. 가축에 생계를 의존하는 목동들은 목초지를 찾아 과격해졌다.

지난 4월 23일 케냐 서부 라이키피아. 동아프리카 대협곡이 지나는 거대한 초지 한복판을 자동차 한 대가 가로질렀다. 차에는 백발이 성성한 이탈리아계 환경운동가 쿠키 갈만(73)이 케냐 야생동물국 보안요원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이 초지는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라이키피아 자연보존공원’이다. 전체 면적이 400㎢, 서울의 3분의 2만큼이나 되는 광활한 곳이다. 전날 이곳 한편에 누군가 불을 질렀다. 갈만은 피해를 살피러 가는 길이었다. 비극은 그 직후 일어났다. 차를 돌려 돌아가던 갈만에게 총알이 날아들었다. 그는 배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보안요원들이 급히 헬리콥터로 갈만을 나이로비의 아가칸 국립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고 아직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딸 스베바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는 괜찮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고 그 힘은 강하다. 어머니가 모든 인생을 바쳐 보호하려 했던 동·식물들의 힘이 어머니를 보호할 것이다.”

지난 3월 1일 케냐 라이키피아주의 한 호수가 가뭄으로 갈라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라이키피아 | 신화연합뉴스

지난 3월 1일 케냐 라이키피아주의 한 호수가 가뭄으로 갈라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라이키피아 | 신화연합뉴스

가뭄 겪는 유목민들 환경운동가를 쏘다

다음날 조셉 은카이세리 케냐 내무장관은 AP통신에 “갈만에게 총을 쏜 용의자 2명이 사살됐고 다른 용의자들은 구금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인근 유목민 포콧족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최근 갈만의 땅을 수차례 침범하며 위협해 왔다. 지난 3월 29일에는 갈만이 아끼는 사파리 오두막이 방화로 재가 됐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에마뉘엘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다. 이때 하마터면 딸 스베바도 유목민의 총에 맞을 뻔했다.

이탈리아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갈만은 1972년 남편 파올로와 함께 케냐로 이주해 대목장을 샀다. 그러나 남편을 차사고로 잃고 1983년 아들마저 뱀에 물려 죽는 불행을 겪은 뒤 이후 환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비극에서 긍정을 만들어 보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소를 모두 팔고 목장 사업을 그만뒀다. 대목장은 환경보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갈만기념재단을 만들어 동·식물 보존사업에 나섰다. 대협곡에 사는 인근 원주민 부족들이 한데 모여 평화와 공존을 배우는 행사를 기획하고 이들에게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알리는 교육을 받게 했다. 갈만의 땅은 멸종위기에 몰린 많은 동물의 피난처가 됐다. 그는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를 노린 밀렵꾼에 맞서는 싸움을 주도했다. 그의 얘기를 담은 자서전 <나는 아프리카를 꿈꿨다>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할리우드 배우 킴 베이신저가 주연한 영화 <꿈꾸는 아프리카>의 원작이다.

유목민들은 이런 갈만에게 왜 총을 겨눈 것일까. 케냐 등 아프리카 동부는 최근 3~4년 내내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다. 케냐는 나라의 절반이 가뭄이 들어 지난 2월 정부가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다. 가뭄으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동물이 먹을 풀도 사라졌다.

가축에 생계를 의존하는 목동들은 목초지를 찾아 과격해졌다. 이들은 손에 칼라시니코프 소총 AK-47을 들었다. 지난해 말 이후 무장을 한 유목민들은 가축 수만 마리를 이끌고 대형 목장이 있는 사유지를 침범하고 협박하는 ‘무법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케냐 정부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목동들을 단속하면 폭력은 더 과격해지는 악순환이다. 지난 3월에도 라이키피아에서 영국인 목장주가 목동들에게 살해되는 등 30명이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특히 갈만의 공원은 목동들의 타깃이 됐다. 수십 년 공들인 덕에 라이키피아에서 물이 마르지 않고 숲과 동·식물이 어우러진 자연을 가진 몇 안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축 수만 마리가 목장을 지나가면 토양이 침식돼 식생을 파괴하고 야생동물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등 생태는 더 악화된다.

4월 23일 케냐 라이키피아 자연보존공원의 화재 피해를 살피러 가던 중 유목민들에게 총을 맞아 의식불명에 빠진 이탈리아 환경운동가 쿠키 갈만. / 쿠키 갈만 페이스북

4월 23일 케냐 라이키피아 자연보존공원의 화재 피해를 살피러 가던 중 유목민들에게 총을 맞아 의식불명에 빠진 이탈리아 환경운동가 쿠키 갈만. / 쿠키 갈만 페이스북

정치적·사회적 갈등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케냐에서 갈만처럼 거대한 목장을 소유한 이들은 대부분 유럽 출신 백인이다. 1900년대 초반 영국 식민지 시절 넘어간 곳이 많다. 1963년 케냐가 독립한 후에도 돈 있는 유럽인들이 땅을 사들여 목장과 사파리 관광사업 등을 하고 있다.

오는 8월 대선·총선을 앞두고 케냐의 일부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토지 불평등 문제를 ‘소수 백인의 탐욕’으로 몰아가며 목동들을 선동하고 있다. 라이키피아농장주협회는 예전에도 가축을 먹일 풀이 없을 때 유목민들에게 농장을 이용하도록 허용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AP통신에 “정치인들이 유목민들에게 ‘땅의 임대기간이 다 끝났기 때문에 목장주들을 몰아내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케냐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부족 키쿠유족은 친정부 성향이지만 갈만의 사건에 연루된 포콧족 사이에서는 야권의 세가 강하다.

환경 갈등에 정치·사회적 갈등까지

지난 4월 말 옥스팜은 “케냐,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등 동아프리카의 가뭄으로 1100만명이 심각한 굶주림에 처해 있다”면서 “기후변화는 먼 미래의 위협이 아니다. 가난, 분쟁, 허약한 정치가 기후변화 및 가뭄과 결합하면 엄청난 폭풍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후변화는 갈등의 원인을 넘어 갈등이 낳은 극단주의와 테러의 ‘무기’로 악용되기도 한다.

가뭄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중앙아프리카 차드 호수 일대 주민들을 헐값에 고용 중인 극단주의 무장세력 보코하람 소속 대원들. / AFP연합뉴스

가뭄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중앙아프리카 차드 호수 일대 주민들을 헐값에 고용 중인 극단주의 무장세력 보코하람 소속 대원들. / AFP연합뉴스

나이지리아·차드·카메룬·니제르의 국경이 만나는 중앙아프리카 차드 호수는 잔혹한 테러를 벌이는 극단주의 무장조직 보코하람이 가장 득세한 지역이다. 이 호수는 인근 4개국 주민 3800만명의 생활 터전이었다. 호수에서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인구는 50년간 2배가 늘었다. 물 사용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온난화가 심해지면서 우기와 건기의 주기는 불안정해졌고 강수량은 줄었다. 결국 호수의 90%가 말라버렸다. 가뭄으로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 호숫가 경제는 붕괴 수준까지 악화됐고, 70개 인종이 모여 살던 지역의 혼란도 커졌다. 빈곤율이 71.5%, 주민 절반은 영양실조 상태다. 보코하람은 생계가 막막한 농부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푼돈으로 매수해 활동대원으로 쓴다.

생계 어려운 농부들 무장세력이 헐값에 고용

독일 싱크탱크 아델피(Adelphi)는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서 보코하람과 같은 테러단체들이 온난화가 초래한 자연재앙, 물과 식량 부족을 이용해 활동대원을 쉽게 구하고 민간인 장악력을 높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리아를 황폐화시킨 이슬람국가(IS)는 대원들에게 월급으로 400달러를 준다. 농촌 평균 임금의 5배나 된다. 최근 5년간 이어진 가뭄으로 살 길이 막막해진 시리아의 농부들과 목동들은 도시로 대거 몰려들었다. 2002~2010년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대도시 인구가 8.9% 늘어난 1380만명으로 폭증하면서 도시의 생존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생계를 잃은 농부와 젊은이들에게 IS는 큰 유혹일 수밖에 없다.

IS는 정부군을 공격하려 2015년 댐의 수문을 닫거나 주민을 몰아내기 위해 물길을 바꿔 홍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인숙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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