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컨테이너선 페가서스, 글로벌 운송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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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A CGM 페가서스는 아마도 인간이 만든 움직이는 물건 중에서는 가장 큰 축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이 배는 63빌딩보다 훨씬 크다. 이 배의 재화중량, 즉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는 13만톤인데, 그런 무게는 우리가 감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요즘 언론마다 한국의 조선업에 닥친 위기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어떤 신문은 ‘구멍 뚫린 조선업 욕심이 빚은 대참사, 국내 조선업계 천문학적 적자 기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한때 전 세계의 바다에 떠 있는 큰 배 중 절반은 한국의 조선소들이 만든 것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한국에서 조선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974년 6월 28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날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한 길이 345m, 폭 52m, 높이 27m의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가 진수했다. 이 배의 진수식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참석했고, 이 광경은 전국에 TV로 생중계됐다. 잘 알려진 바대로 현대중공업의 정주영 회장은 아무 토대도 없는 상태에서 조선산업을 일으켜 ‘기적’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그 무리수가 지금까지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의 조선산업의 위기는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대규모 해양 플랜트를 무리하게 수주한 탓이니 말이다.

하지만 호황기 동안 조선업을 먹여 살린 배는 대형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이었다. 필자는 한국의 조선소가 만든 대형 컨테이너선을 타고 항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배의 내외부를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테크놀로지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탄 CMA CGM 페가서스는 울산의 현대중공업에서 만든 1만1300TEU급의 컨테이너선이다. (TEU란 길이 20피트의 컨테이너 한 개를 말한다. 따라서 20피트 컨테이너 1만1300개를 실을 수 있는 배라는 뜻이다) 이 배를 타는 순간 ‘명품이다!’라는 생각이 딱 들었다. 길이가 360m, 폭이 46m, 흘수 15m의 이 배는 거대한 강철 덩어리인데, 수많은 강재들을 용접해서 만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의무봉, 단단해 보였다. 그 안에 수많은 엔진들과 펌프들, 파이프들과 전선들이 얽혀 있는 이 배는 엄청난 시스템의 결과물이었다. 이 배 자체가 아주 크고 복잡한 시스템이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까다로운 선주들에게 몇십 년 동안 큰 선박들을 공급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1만여 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남중국해의 거친 바다를 뚫고 항해 중인 CMA CGM 페가서스. / 이영준

1만여 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남중국해의 거친 바다를 뚫고 항해 중인 CMA CGM 페가서스. / 이영준

테크놀로지의 기적이라 할 만한 명품
CMA CGM 페가서스는 오늘날 빨라지고 거대해진 글로벌 운송의 표상이다. 재화중량 13만톤의 무게로 신화 속의 페가서스처럼 날 수는 없겠지만 1만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시속 24노트로 순항할 수 있다는 것은 신화 속 페가서스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CMA CGM 페가서스는 신화 속 페가서스의 물질적 환생이면서 동시에 에너지는 10만 배로 증폭된 확대변형판이다. 마력이란 문자 그대로 말 한 마리의 힘을 말하는 것이니 페가서스란 이름은 배의 힘과 잘 어울린다.

‘괴물’ 같은 엔진이 내뿜는 둔중한 저음
배를 영어로 vessel(그릇)이라고 하는데, CMA CGM 페가서스는 정말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작은 반도에서 태어나 눈앞의 이익에만 아웅다웅하던 한국 사람이 큰 배를 만들면서 그릇이 커진 것이다. 매일같이 된장찌개를 먹고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아저씨들이 이런 배를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뭐든지 적당히 빨리빨리 대충대충 해치우면 된다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배를 만들었다. 물론 전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만 이 배를 만든 것은 아니다. 이 배가 국산이라고 해서 모든 부품과 기술이 국산인 것은 아니다. 이런 크고 복잡한 물건은 국제적인 협업과 분업으로 만들어지지 오로지 어느 한 나라가 만들어서 파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대작을 만들 때 조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도 궁극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듯이, 이 배는 현대중공업의 작품이다.

한국에서 만든 이 배가 자랑스러워서 선장에게 한국의 조선업 수준이 놀랍지 않으냐며, 지난해에 수주된 전 세계의 LNG선은 몽땅 한국의 조선소들이 만들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런데 선장은 크로아티아 사람이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크로아티아에서도 그가 태어난 곳은 조선소들이 많았던 도시 리예카(Rijeka)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리예카의 조선소들은 다 파리를 날리고 있고, 수주는 한국과 중국의 조선소에 빼앗기고 노동자들은 다 일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의 기업이 성장한 뒤에는 다른 나라 기업의 몰락이라는 그림자가 있는 것이었다. 이 배를 타던 2011년만 해도 한국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이 유럽의 조선소 신세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제일 많이 들어온 말이 ‘열심히’니까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이 되었고, 반도체·자동차가 세계 수준에 이르렀는데 ‘열심히’ 저 너머의 지평은 없을까? 이제는 세계에서 제일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있으니 열심히 말고 다른 지평을 찾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선장의 집이 있는 풀라의 사람들은 열심히 사는 대신 마당에 올리브와 포도를 심어서 올리브유를 짜고 포도주를 만들어 이웃에 나눠주며 산다고 하는데, 이런 여유는 사치이거나 죄악이어야만 하는가?

상하이 양샨항에 입항 중인 컨테이너선 MSC Danit. 전 세계의 바다에 떠다니는 초대형 선박의 절반은 한국의 조선소가 만든 것이다. 스위스 회사인 MSC가 운용하고 있는 이 배는 대우조선해양이 만든 것이다. / 이영준

상하이 양샨항에 입항 중인 컨테이너선 MSC Danit. 전 세계의 바다에 떠다니는 초대형 선박의 절반은 한국의 조선소가 만든 것이다. 스위스 회사인 MSC가 운용하고 있는 이 배는 대우조선해양이 만든 것이다. / 이영준

하지만 비평가의 궁극적 관심은 그런 막연한 문제가 아니라 이 배를 끌고 가는 기계적 추진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이 MAN B&W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만든 2사이클 디젤엔진은 10만 마력의 출력을 낸다. 엔진의 높이는 12m, 무게는 2000톤, 길이는 25m이다. 이 엔진의 크기와 힘과 소리와 진동과 복잡한 구조는 괴물이라고 부르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 괴물 엔진은 큰 바다를 건널 때 며칠을 계속 전속력으로 가동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내구성이 좋다. 배에는 출력 10만마력의 주엔진 외에도 출력 3000마력의 발전용 디젤엔진이 5대, 각종 펌프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내는 화음은 상당히 복잡하다. 항해 중에는 메인엔진의 소리가 둔중하고 무거운 저음으로 들려온다. 엔진실은 배의 아래쪽에 있으므로 그 진동과 소리는 여러 겹의 쇠로 된 구조물이라는 필터를 통과하여 많이 걸러진 것이다. 그래서 선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전달되는 것은 매우 추상화된, 낮은 울림일 뿐이다. 소리라기보다는 어떤 무거운 에너지만이 전달된다. 그것은 아주 저음이기 때문에 어떤 소리라고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인의 심장이 뛰듯 쿵쿵하고 울려올 뿐이다. 정박 중에는 말 10만 마리의 힘을 가진 거인은 잠자고 있으므로 무거운 진동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발전용 디젤엔진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인데, 대개는 정박 중에는 5대의 엔진 중 한 대만 켜 놓는다. 3000마력이라고는 하지만 10만 마력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기 때문에 발전용 엔진의 소리는 선실까지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그냥 뭔가가 살살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이 배는 아마도 인간이 만든 움직이는 물건 중에서는 가장 큰 축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이 배는 63빌딩보다 훨씬 크다. 도대체 크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인가? 사실 근대의 테크놀로지가 나타난 이래 크기에 대한 욕망은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지점을 지난 지 한참 오래다. CMA CGM 페가서스의 재화중량, 즉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는 13만톤인데, 그런 무게는 우리가 감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그런 막막함은 배를 타고서도 풀리지 않는다. 배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해운업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무게나 크기는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숫자로만 다가올 뿐이다.

이 배가 아주 크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지표는 아주 많지만 시간만큼 분명하게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없다. 페가서스의 엔진을 비상시에 전속전진에서 전속후진으로 바꾸는 데 6분11초가 걸린다. 그리고 전속전진으로 항해하다가 완전히 정지하기까지 16분이 걸린다. 그 16분 동안은 지구상의 어떤 것도 페가서스를 멈출 수 없다.

2010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화물운송에서 컨테이너가 차지하는 비중은 재화중량 기준으로 13.3%다. 전 세계 컨테이너선의 재화중량의 총량은 1980년의 1100만톤에서 2010년에는 1억6900만톤으로 늘어났다. 현재 전 세계 컨테이너선의 평균 선령은 10.6년이다.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인도받은 지 1년이 지난 페가서스는 아주 젊은 배다. 벌크선의 평균선령은 16.6년, 원유선은 17년으로서, 컨테이너선이 화물선으로는 제일 어린 축에 속한다. 오늘날 철광석이나 석탄, 황이나 원목 같은 벌크화물이 아닌 화물의 90%는 컨테이너에 실려 수송되고 있다. 화물운송의 컨테이너화는 전기시스템을 교류로 통일하거나 컴퓨터의 데이터 전송방식을 USB로 통일하는 것에 비교될 만큼 중요한 일이다. 컨테이너는 화물운송의 속도와 비용을 줄이기도 했지만, 튼튼한 강철상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화물이 파손될 위험이 적다. 그냥 직육면체의 강철통인, 밖에서 잠그는 자물쇠를 빼고는 아무런 장치도 없는 컨테이너가 그렇게 많은 역사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내 어느 조선소에서 컨테이너선을 짓고 있는 모습. / 조춘만

국내 어느 조선소에서 컨테이너선을 짓고 있는 모습. / 조춘만

직육면체 강철통의 역사·경제적 의미
사실 컨테이너 자체는 바보상자인데, 그 주변에 많은 장치들이 붙어서 복잡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배에서는 1등 항해사가 어느 항구에서 어느 회사의 컨테이너 몇 개를 배의 화물칸 어디에다 실을 것이며, 그에 따른 무게 배분은 어떻게 하고,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발라스트 탱크는 부위별로 얼마씩 채워야 하는지 계산한다. 물론 오늘날은 그런 계산을 도맡아 주는 Deackmaster Marine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 해준다. 항구에서도 그와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어떤 배가 어떤 컨테이너 몇 개를 내리고 받을 것이며, 어떤 트레일러들이 언제 몇 번 선석에서 컨테이너를 실어낼 것인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이런 모든 스마트한 프로그램들이 컨테이너를 전 세계 해상운송의 총아로 만들어 주었다.

만일 컨테이너가 없었으면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자잘한 물건들을 만들어 팔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그것들을 수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페가서스도 그렇고 CMA CGMA의 다른 배들도 그렇지만, 유럽과 중국을 잇는 노선에 가장 큰 배들이 투입되며, 보통 한 나라당 하나의 항구에 들르는 것과 달리 중국에서는 다리안·톈진·상하이·샤먼·홍콩·얀탄 등 많은 항구에 들르는 것만 봐도 글로벌한 컨테이너 운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MS 윈도만 깔면 어떤 컴퓨터든지 전 세계에서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컨테이너 터미널만 지어 놓으면 글로벌한 운송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다.

거친 바다와 까다로운 인간을 매개해주는 인터페이스인 배는 바다와 인간 양쪽의 조건과 요구사항을 다 충족해야 하는 고달픈 신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더 많은 짐을 싣도록 배를 만들면 그렇게 해야 하며, 바다가 거친 파도로 후려치면 배는 다 맞아야 한다. 인간이 빨리 가도록 재촉하면 배는 몸이 부서져라 프로펠러를 돌려야 하며, 짠 바닷물이 선체를 적시면 부식을 견뎌야 한다. 배는 바다의 여러 조건들과 인간의 여러 요구들 사이에서 적절한 매개를 취해야 하는, 참으로 미묘한 인터페이스이다.

<이영준 기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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