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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갈아엎는 4월

붉은색, 푸른색, 녹색, 노란색, 회색 다섯 가지 색깔로 칠해진 지도는 아름답다. 마치 봄꽃이 만연한 봄 산을 보는 것 같다. 다섯 색깔의 조화로 이 땅에 상서로운 기운이 넘쳤으면 하는 상념에 젖어 형형색색의 20대 총선 정당별 의석 확보 지도를 보는데,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언제부터 이 아름다운 4월에 총선이 치러졌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17대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 이상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찾아 보니 20년 전 15대 총선 때부터였다. 13대 때도 4월에 치러졌으나 15대 때부터 4월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4월은 1996년부터 4년마다 ‘총선의 달’인 셈이다.

우리에게 4월은 총선의 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원초적으로 4월은 ‘잔인한 달’이자 ‘저항의 달’이다. 잔인한 달의 이미지는 학창시절 배운 T S 엘리엇의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장시 ‘황무지’ 덕분에 심어졌다. 끝까지 읽지도 않은 채(읽어보아도 이해할 수도 없었겠지만), 모더니즘이니 전쟁과 소외된 인간상 운운하던 선생님의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에 고개만 갸우뚱거렸지만 4월의 이미지는 그렇게 내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엘리엇의 시구가 가슴에 사무치게 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2년 전 세월호 참사다. 저항의 달 이미지는 당연히 4·19혁명 때문에 굳어졌다. 4·19의 시인 신동엽은 ‘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고 노래했다.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그래서인가. 해마다 4월이 되면 혁명을 꿈꾸고, 반역의 피가 끓고, 저항심이 불끈 솟아나는 듯했다.

4·13 총선 결과를 보니 4월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어졌다. 그동안 총선이 치러지는 4월이 되면 갈아엎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기존 정치체제는 물론 기성 정치인 모두 갈아엎고 싶었다. 가식과 허위, 부정과 부패 등 모든 부조리를 갈아엎고 싶었다.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고 부르짖었듯 알맹이만 남긴 채 모든 것을 갈아엎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막상 투표소로 달려가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한 표의 소중함보다 무력감이 밀려왔다. 선거 결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2년 전부터 많은 이에게 4월은 세월호 그 자체였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슬픔과 고통도 허락되지 않았다. 분노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두가 세월호의 죽음을 참사 또는 재난, 학살이라고 부르는데도 교통사고라고 부르는 정치모리배들이 설치는 후안무치한 현실. 세월호 참사 이후 처음 치러진 이번 총선은 이 현실을 갈아엎을 기회였다. 시민들은 분연히 일어섰고, 기회를 실현할 수 있는 쪽으로 한 뼘쯤 다가갈 수 있는 결과를 얻었다.

이번 호(1173호)를 마감하는 다음날은 때마침 세월호 참사 2주기다. 그날 새벽, 아이들이 바다에 갇혀 있을 때 ‘내 고통은 바닷속 한 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다’는 방민호 시인의 회한을 가슴 한편에 품고 때늦은 팽목항행 버스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전복과 반전을 꿈꾸며 신동엽을 만나러 간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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