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이젠 문화공간으로 손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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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의 진화는 야구 관람 경험의 변화뿐만 아니라 야구산업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야구장은 단지 승리의 경험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야구를 보는 재미 자체, 야구를 보는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묘사하는 야구장은 소주병과 욕설이 일상처럼 쏟아져나오는 공간이다. 프로야구가 개막한 1982년, 야구장은 욕망이 분출하는 곳이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모자라 내야석 앞 그물을 타고 올라가기 일쑤인 곳이었다. 막혀 있던 시대, 답답했던 시간 속에서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여전히 남성적인 곳이었고, 소주와 욕설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야구를 봤고, 자라서 ‘베이스볼 키드’가 됐다.

2016시즌은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5번째 맞는 시즌이다. 더 이상 야구장은 소주와 욕설의 공간이 아니다. KBO는 지난해부터 SAFE 캠페인과 함께 음주를 제한하고 있다. 캔 대신 1ℓ 이하의 페트병만 허용한다. 여전히 마산구장에서는 취객이 그라운드에 뛰어드는 장면이 나왔지만 더 이상 흥이나 멋진 일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야구장은 더욱 크게 바뀌었다. 최초의 돔구장 고척 스카이돔이 개장했고, 올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홈구장으로 사용된다. 삼성 역시 낙후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벗어나 새로 지은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새 시즌을 시작했다.

야구장은 그저 경기를 잘하기 위한 시설만 갖추지 않는다. 야구장은 새로운 문화의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영화가 TV의 발명 이후에도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변화과 궤를 같이했다. 야구장 역시 극장의 변화처럼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4월 3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프로야구 롯데 대 넥센 경기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4월 3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프로야구 롯데 대 넥센 경기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가상현실 중계에 먹거리 모바일 주문도
KBO리그의 막내구단 KT는 수원 KT WIZ 파크를 홈구장으로 쓴다. 2015시즌 새 단장을 한 수원 구장은 이름을 KT WIZ 파크로 바꿨다. 통신기업 KT의 홈구장답게 관람 편의를 위한 신기술들이 도입됐다. KT는 개막 3연전에서 VR(버추얼 리얼리티·가상현실) 모바일 중계 기술을 도입했다. 야구경기를 모바일 VR 형태로 중계하는 것은 세계 최초다. 구단 애플리케이션 ‘위잽(Wizzap)’을 통해 제공되는 VR영상을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기기에 장착하면 바로 앞에서는 선수들이 뛰는 장면을, 뒤에서는 치어리더의 퍼포먼스가 실감나게 전달된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생생한 360도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1루와 3루, 포수석에 3대의 VR 전용 카메라가 위치해 있고, 팬들은 마치 실제 그 자리에 앉아서 관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야구장에 없어도, 마치 야구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장을 찾은 이들은 먹을거리를 담은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돌아다니는 행상으로부터 소주와 오징어를 샀다. 경기에 이기고 있으면 기분 좋은 아저씨 팬은 아주머니를 불러 잔뜩 사들인 뒤 주변 팬들에게 한 턱 쏘기도 했다. 이제 옛 추억이 됐다.

KT는 ‘스마트 오더’ 시스템을 개발해 올 시즌 홈구장에 적용했다. 수원 KT WIZ 파크의 유명 먹거리인 치킨과 만두를 모바일로 주문할 수 있다. 예매한 표와 연동되기 때문에 좌석 위치가 파악된다. 배달 시간을 예상해 미리 예약을 해두면 정해진 시간에 치킨과 만두가 해당 자리로 배달되는 방식이다. 굳이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구장 내 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야구장의 진화는 통신 라이벌 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 SK 와이번스의 홈구장 인천 SK행복드림파크에서도 큰 폭으로 이뤄졌다.

SK는 올 시즌 구장에 가로폭 64m짜리 대형 전광판을 설치했다. 전 세계 야구장 중 가장 큰 전광판이다. 세로 높이도 18m에 이른다. 전광판을 눕혀 놓는다면 농구장 3면을 넣을 수 있는 넓이다. 승리를 뜻하는 vic을 붙여 빅보드(vic board)라고 이름 붙였다.

단지 중계화면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야구장에 설치된 48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경기 장면을 회전시켜 감상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됐다. 실제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는 것과 함께 옆에 커다란 스마트 TV를 함께 지켜보는 새로운 야구 관람 경험이 이뤄진다. 커다란 화면에 다양한 기록이 그래픽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경기 장면과 스탯의 공유가 동시에 이뤄진다. 예전 같았으면 선수들의 기록이 나온 신문을 들고 야구장을 찾아 해당 선수의 기록을 뒤져가면서 야구를 봤겠지만, 이제 바로 눈앞에서 기록이 드러난다. 야구 보는 재미가 달라졌다.

대형 전광판 빅보드로는 스마트폰과 연결된 게임을 즐길 수도 있다. 앱을 설치해 실행하면 빅보드 화면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을 스마트폰 터치를 통해 타격해 볼 수 있다. 터치의 정확도에 따라 타구의 비거리가 달라진다. 가로 64m짜리 TV로 즐기는 게임은 확실히 색다른 경험이다.

롯데의 홈구장 사직구장은 열광적인 ‘봉다리 응원’과 ‘신문지 응원’으로 유명하다. 부산 팬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부르는 ‘부산 갈매기’는 그 자체로 장관을 연출한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열광적인 롯데 팬들의 응원을 가리켜 ‘세계 최대의 노래방’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사직 노래방’이 ‘사직 나이트’로 바뀐다.

롯데는 총 40억원을 들여 사직구장의 조명시설을 LED 조명으로 바꿨다.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 양키 스타디움과 시애틀의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에 설치된 것과 같은 조명이다. LED 조명의 특징은 조명 하나하나를 바로바로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야구장의 조명은 열전구 형태여서 한 번 꺼지면 조명이 식을 때까지 약 20여분 동안 기다렸다 켜야 했다. 잠실구장에 순간정전이 일어나면 다시 켤 때까지 20여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캄캄한 암흑 속에서 경기가 중단된 채 마냥 기다려야 했다. 사직구장은 조명을 껐다 켜는 게 자유로운 것은 물론 조명을 이용한 글씨 연출도 가능하다. 나이트 클럽의 반짝이 조명처럼 조명탑을 컨트롤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64m 대형 전광판 등장과 LED 조명도
야간경기, 다양한 효과를 줄 수 있다. 롯데는 실제 롯데 선수가 홈런을 때렸을 때 화려한 조명 세리머니를 펼친다. 최준석이 홈런을 때리고 베이스를 도는 동안 ‘사직 노래방’은 ‘사직 나이트’로 변신한다. 경기에서 이기면 다시 한 번 커다란 조명 세리머니가 펼쳐진다. 대형 야외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시각적인 효과가 팬들의 야구 보는 재미를 더욱 크게 만든다.

롯데는 야구장의 외부 조명도 교체했다. 조명은 메시지 역할을 한다. 야구장 안이 아니라 밖에서 야구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안과 밖이 통한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 주황색으로 밝혀진 사직구장 외관은 홈런이 나왔을 때 파란색으로 바뀌면서 경기 상황을 전한다. 경기가 승리로 끝나면 사직구장 바깥은 무지개 조명으로 채워진다. 사직구장에 무지개가 뜨면 이는 곧 승리 신호다.

새로 개장한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는 새 구장답게 기존 야구장이 갖지 못한 새로운 관람 경험을 갖도록 설계됐다. 야구 관람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도록 새 구장 내 모든 관중석의 좌석이 마운드를 향했다. 어느 좌석에 앉든지 시선의 정면은 마운드를 향한다. 더 이상 앞사람 머리 때문에 야구 관람이 방해 받을 일도 없다. 관중석 좌석의 모든 열이 지그재그 형태로 미세조정돼 있어서 어깨 사이를 통해 야구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편안하게 야구를 볼 수 있다는 점은 마치 프리미엄 영화관을 떠올리게 한다.

야구장의 진화는 야구 관람 경험의 변화뿐만 아니라 야구산업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야구장은 단지 승리의 경험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야구를 보는 재미 자체, 야구를 보는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승리 말고도 다른 가치들이 더욱 더 자라난다면 야구는 그 자체로 문화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역시 극장의 발전과 함께했다. 새로운 기술과 함께 새로운 관람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블록버스터 영화는 더욱 발전했다. 야구 역시 새로운 관람 경험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 있는 중이다.

<이용균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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