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딜의 시대’ 문제는 인력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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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한화·롯데에 화학 · 방위산업 넘기기로… SK텔레콤은 CJ헬로비전 인수키로

기업의 ‘구조조정’. 말 자체는 중립적이다. 쉽게 말해 사업 분야를 떼거나 붙이고, 기업을 사거나 파는 식이다. 정작 문제는 설비나 건물 같은 걸 손대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데 있다. 어떤 이들은 하루 아침에 ‘삼성맨’에서 ‘한화맨’이 되고, 누구는 지방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 자칫 업무 중복 따위를 이유로 벼랑 끝에 내몰리게도 된다.

구조조정은 이상적으로는 장사가 잘될 때 하면 ‘누이(파는 쪽) 좋고, 매부(사는 쪽) 좋고’다. 나간 사람도 새 일자리 찾는 데 그만큼 부담을 던다. 그러나 현실은 꼭 경기가 나쁠 때 구조조정이 벌어지기 일쑤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가 그렇다. 정부는 대우조선해양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손을 쓰지 않다가 경제위기 때 팔려고 하니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인수 뒤 당장은 보는 눈이 있어서 인력 조정을 하기 어렵다. 세간의 시선이 멀어지고나서부터가 진짜 문제다.

근래에 국내 기업 간 ‘대규모 사업교환(빅딜)’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위기에 처한 조선과 해운까지 묶거나 파는 사업 조정방안이 거론된다. 빅딜에는 자칫 인력 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이 뒤따를 수 있고, 또 과거 ‘국민의정부’ 시절 반강제적 빅딜처럼 정치적 압박에 의할 경우 부작용이 커질 수도 있다.

최근 사업 조정은 주요 그룹 계열사 사이에 자율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굵직한 빅딜은 삼성그룹에서 출발했다.

서울시 중구 청계천로 한화그룹 본사

서울시 중구 청계천로 한화그룹 본사

빅딜은 꼭 경기 나쁠 때 벌어지기 일쑤
삼성은 지난해 11월 방위산업 계열인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와 석유화학 쪽의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토탈을 총 1조8541억원대로 한화그룹에 넘기로 했다. 이어 10월에는 남은 화학 분야인 삼성SDI의 케미칼 부문과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을 롯데그룹에 넘기기로 했다. 인수가는 약 3조원으로 추산돼 한 묶음으로는 1997년 외환위기 이래 그룹 간 최대 빅딜이다.

앞서 2013년부터 삼성그룹은 전자와 금융 위주로 재편하며 삼성물산, 삼성SDS 등 다수 계열사를 떼거나 붙이는 등 사업 조정을 숨 가쁘게 해 왔다. 배경에는 그룹 신성장 동력 찾기와 이건희 회장 건강 이상을 둘러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3남매로의 경영권 승계용 멍석 깔기 성격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른 그룹과의 빅딜만 보면 삼성에서 비중이 적고 주력업종이 아닌 화학계열 정리여서 ‘잘할 수 있는 분야 위주의 재편’이라는 의미가 있다. 화학에 강점이 있는 한화와 롯데는 LG화학을 필두로 3대 화학계열로 위상을 높인 효과가 있다. 롯데와 한화의 그룹 위상이 커진 것은 물론이다. 한화그룹 임원은 “테크윈과 탈레스는 우리가 주로 해온 방위산업 분야여서 예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본 곳들인데, 필요한 화학계열도 함께 인수하게 됐다”며 “중점 분야를 키우는 방향으로 거래가 성사됐다”고 말했다.

10월 30일에는 SK텔레콤이 430만명 이상 가입자를 가진 1위 유선방송사업자 CJ헬로비전을 인수키로 전격 발표해 재계 빅딜에 가세했다. 일각에서는 미디어사업을 중시하는 CJ가 유통 계열사를 매각한 데 대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CJ 관계자는 “우리 강점인 콘텐츠 생산에 더 집중하고, 수익을 잘 못 내던 유통망은 정리하고 그쪽을 키우려는 SK에 넘기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SK가 유선방송 분야를 인수키로 하자 방송·통신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통신 1위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를 통해 유성방송과 IPTV 분야까지 국내 유무선 통신 분야의 절대강자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불황기 사업재편 과정에서는 중공업, 건설, 해운, 철강 등 분야에서 그룹 간 추가 빅딜이 일어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적자가 쌓이며 출혈경쟁을 하거나, 이대로 사업을 끌고가기 어려울 바에 정리할 건 정리하고 핵심 사업만 가져가려는 시도가 나올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한 기업에서 빅딜설이 흘러나오는 점이다. 부실해진 대우조선해양을 처리하기 위해 다른 기업과 묶어 국내 ‘빅2’ 중공업체로 덩치는 더 키우고 숫자는 줄이는 방향의 구조조정 시나리오가 최근 제기됐다. 또 대우조선해양을 그룹사에 넘기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놓고 ‘정부 측과 SK가 막판 협상을 진행한다’는 설은 주채권단인 산업은행과 해당 그룹이 “사실무근”이라고 밝혀 일단락됐다. 그러나 한 재계 인사는 “정부 측이 앞서 다른 그룹에도 대우조선해양 인수 의사를 타진한 바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빅딜의 시대’ 문제는 인력 구조조정

대우조선해양 빅딜, 대규모 감원 가능성
현실적으로는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주체가 마땅찮다. 1위 현대중공업은 너무 덩치가 크고 시너지 효과가 별로 없는 편이다. 다른 기업들은 여력이 없어 보인다. 2008년 대우조선을 인수키로 했다가 금융위기로 손을 들고 나간 한화는 “최근 삼성의 화학·방산 계열 인수에서 보듯 돈도 없고 이제 의지도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인수전에 나선 포스코 또한 본업인 철강사업 개선에 더 바쁘다. 롯데 측도 “삼성의 화학 계열은 물론 앞서 올해 5월 KT렌탈(1조200억원)을 비롯한 잇단 인수·합병으로 여유도 없거니와, 중공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롯데는 신동빈 회장 체제 들어서 2012년 하이마트(1조2480억원)를 포함해 총 37개 업체, 14조원대 ‘기업 쇼핑’을 했다.

그렇다면 현실적 대안은 삼성중공업이 꼽힌다. 올해 3분기에 100억원 영업적자를 낸 삼성중공업도 대우조선해양을 끌어들일 처지는 못 된다. 다만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둘을 합쳐 ‘빅2’를 만들자는 주장이 있다. 서로 규모가 비슷하고, 지역도 같은 거제여서 합치는 데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방위산업을 하는 대우조선과 방산이 없는 삼성중공업은 보완이 된다.

그러나 반대 견해도 만만찮다. 중공업체 관계자는 “특히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은 사업 분야가 방산을 빼면 비슷해서 오히려 덩치만 커질 뿐 상충되고, 대규모 인력 감축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화학 기업들은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많아야 수백~1000명 수준이어서 빅딜의 후유증이 적지만, 수만명이 일하는 조선업은 자칫하다가는 1만명 넘는 감원으로 이어질 수 있어 민감하다”고 말했다. 관리조직과 연구개발, 설계, 구매 분야에서 서로 겹치는 인력의 조정이 뒤따른다.

그동안 저가수주 경쟁으로 비대해진 조선 설비와 인력을 조정하는 건 불가피해 보이지만, 당장 눈앞만 보고 더하기 빼기 식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것도 문제다. 업계나 전문가들은 “정부가 국내 업체끼리 저가수주전을 벌이는 과잉경쟁을 조정하고, 고급 선박이나 해양플랜트의 원천설계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멀리 내다봐야 할 때”라며 “그러나 단순히 비슷한 곳을 합치거나, 새 인수자만 찾는 식의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덩치만 키워 단가 경쟁을 하다가는 머잖아 후발 중국 업체에 따라잡힐 게 불 보듯 뻔하다. 한 재계 임원은 “앞으로 중국을 겨냥해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는 게 중요한데, 단순히 규모를 키우기 위해 기업들에게 떠맡기는 식으로 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경기침체로 허덕이는 국내 해운업계 1위 한진해운과 2위 현대상선의 빅딜설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진해운은 “정부로부터 현대상선 합병에 대한 검토를 요청받았으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정부 주도형 빅딜을 추진할 가능성을 엿보인 단면이다. 정부는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참여한 구조조정 협의체를 마련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둘 다 컨테이너선을 주력으로 하는 등 사업이 비슷해서 합쳐도 효과가 크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히려 적자만 커질 수 있다.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도 합병안을 검토했으나, 양대 해운사로 보완하는 체제가 낫다고 결론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빅딜 제안설이 나오자 양사 임직원들은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빅딜설로 뒤숭숭
한화는 삼성과의 빅딜 후 직원들 반발로 적잖은 홍역을 치렀다. 합병 후 임금·단체협상 과정에 노조의 파업과 사측의 직장폐쇄 맞불로 갈등을 빚은 한화종합화학은 지난 4일 양측이 물러서며 합의안을 겨우 마련했다. 노조는 상여금을 올해부터 200%씩 2년 안에 600%를 적용하고, 임금피크제는 56세부터 60세까지 적용하는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데 합의했다. 또 통상임금 소급분 150만원을 일시 지급하고 휴가 5일을 신설하는 조건에도 뜻을 모았다.

앞서 삼성종합화학 직원은 한화로 갈아타는 대신 1인당 평균 5500만원의 위로금을 받았다. 한화테크윈은 1인당 4000만원, 한화탈레스는 20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양사 임금 격차, 복리, ‘삼성맨’ 명패를 놓친 데 따른 자존심을 놓고 직원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가 겨우 봉합됐다. 롯데로 가게 된 삼성정밀화학 등의 직원 2200여명은 고용보장을 약속받았을 뿐 아직 구체적 임금, 복지 같은 처우는 합의에 이르지 못해 불씨는 남아 있다. 한화테크윈은 금속노조 경남지부 조합원들이 근로조건 유지, 처우 보장, 고용안정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조합원 62명을 지난달 무더기 징계하는 등 아직 갈등을 겪고 있다.

내년에 SK브로드밴드에 합병될 것으로 보이는 CJ헬로비전 직원들은 창립기념일(11월1일) 눈 앞에 김진석 대표의 사내방송으로 회사가 팔린 사실을 뒤늦게 통보받았다. 이후 김 대표가 현장을 돌며 사과했으나 뒤통수를 맞은 뒤였다. 직원들은 일단 SK로 고용승계된 뒤 논란의 알뜰폰 사업 매각 과정이나 겹치는 유선방송 분야에서 인원 감축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삼성그룹발 빅딜 내지 구조조정 여진은 진행형으로 보여 임직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화학을 정리한 삼성이 다음에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주목된다. 그동안은 건설, 중공업 부문의 재편이 거론돼 왔다. 제일모직과 합쳐 덩치를 키운 삼성물산에서는 구조조정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제일모직(옛 에버랜드)의 리조트 및 건설 부문과 기존 삼성물산 조직이 중복돼 희망퇴직을 받는 중이다. 올 3분기에만 1조5000억원 적자를 낸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의 합병설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삼성물산은 삼성엔지니어링과 플랜트 인력도 상당 부분 겹친다. 삼성의 추가 사업재편이 이뤄진다면 그룹을 넘어 재계 사업 판도 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 정부’ 정치적 빅딜, 성공했을까?

1997년 IMF 외환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재벌의 중복·과잉 투자에 그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이에 따라 그룹 간 사업교환(빅딜)이라는 칼을 꺼내들었다. 1998년 7월 정부·재계 간담회에서 5대 그룹의 빅딜이 결의됐다. 당초 10대 업종을 예시했다가 반도체·석유화학·항공기·정유·전자 등 7개 업종이 대상이 됐다. 결국 반도체와 철도차량·항공기만 빅딜이 이뤄졌고, 나머지는 잡음 끝에 무산됐다. 외환위기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삼성의 자동차를 털어내고 대우의 전자와 맞교환하는 최대 빅딜은 결렬됐다.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자 삼성과 대우는 자동차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 빅딜을 고려했다. 1998년 11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주재 아래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우중 대우 회장은 삼성차의 빚은 대우가 안고 삼성은 대우전자를 사들인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가격 산정에서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자금난인 대우가 적극적이었으나, 삼성은 대우전자 실사 후 부실이 많다고 판단했다. 삼성차는 법정관리 후 프랑스 르노에 팔렸다. 대우그룹은 빅딜 무산 후폭풍으로 자금난에 빠져 해체 수순을 밟았다.

LG와 현대 사이 반도체 빅딜 또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시스템 반도체를 앞세워 우위로 평가된 LG는 끝까지 반발했으나 신규대출을 중단시키는 등 금융제재가 들어가자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회동한 뒤 결국 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겨야 했다. 그러나 현대전자는 1년 만에 자금난에 빠지고 경기침체까지 겹치자 10조원의 빚을 내고 2001년 채권단에 넘어갔다. 오늘날 삼성과 LG의 격차가 벌어진 이유는 반도체를 뺏긴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빅딜이야 말로 있어서는 안 될 정치적 산물이었다”며 “시장 원리에 맡기고, 추후 인수·합병은 기업들의 몫으로 남겼어야 했다”고 말했다.

현대모비스·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등이 참여한 철도차량 사업 빅딜은 1999년 7월 현대로템으로 통합됐다. 석유화학ㆍ조선 등은 빅딜이 성사되지 못했다. 항공기 제조는 당시 대한항공·대우중공업·삼성항공·현대우주항공으로 나눠졌으나 대한항공을 뺀 나머지가 통합해 한국항공우주(KAI)를 설립했다.

결과를 보면 정치적 빅딜은 성사시키기도 어려운 데다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빅딜 과정에서 출자전환해준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함에 따라, 부실해진 은행에 혈세인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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