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앞에 내몰린 ‘배다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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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삶을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배태한 지역의 장소를 지켜낸 사람들로부터 공간도 빼앗고 기억도 빼앗아서 ‘가짜 낭만화’된 전시물로 뒤바꿔서 자신들의 정치적, 행정적 입지를 도모하려는 획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박활민씨는 디자이너다. 홍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2001년 통신사 광고를 통해 큰 인기를 모았던 캐릭터 ‘카이홀맨’을 디자인했던 이력의 소유자다. 그런데 통상적인 의미의 디자이너를 오래전에 그만뒀다.

박활민씨는 스스로를 생활방식 모험가, 노머니경제센터장, 잔액부족초기 족장, 생각수집가, 넝마스터, 다거점 거주 생활방식을 위한 장소 임대업자 등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인류 사상 최초의 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삶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그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지난해 봄, 내가 출강하던 대학교에서 그를 특강 자리에 초빙했는데, 그는 젊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디자이너의 일이 원래부터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삶’은 추상적이거나 존재론적인 형이상학의 단어가 아니라 21세기 초엽의 긴박하고 살인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인천 양조장 건물이 지금의 스페이스빔이다. | 정윤수 기자

인천 양조장 건물이 지금의 스페이스빔이다. | 정윤수 기자

생활 속으로 진입한 예술가들
이 거대한 정글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쟁 일변도의 삶을 살아간다. 특히 젊은 세대는 스펙 경쟁에 몸을 던져 모두가 차례로 익사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자이너가 삶 자체를 다시 생각하고 다른 삶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날의 특강에서 말했다. 박활민씨는 적정기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적은 비용으로도 도시 안에서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실험을 모색하며 자급자족의 삶을 디자인한다.

민운기씨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예술에서도 스펙이 필요하다면 민운기씨의 스펙은 우리나라의 화단이나 아카데미즘에서 자유롭게 쓰일 수 있는 ‘프리패스’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런 스펙의 세계나 좁은 의미의 예술의 세계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있다. 그는 1990년대부터 화폭 속의 재현된 삶이 아닌 실제의 ‘삶’으로 진입하였다. 그의 ‘삶의 거점’은 인천 배다리 마을에 있는 스페이스빔이다. 헌책방과 북카페와 스페이스빔이 있는 이 일대를 배다리 마을이라고 한다. 오래전, 만조가 되면 서해의 물이 불어나서 지금의 송현초등학교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들어 다녀야 해서 배다리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스페이스빔의 내부 전경. | 정윤수 기자

스페이스빔의 내부 전경. | 정윤수 기자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양조산업이 시작되었다. 1899년 개항 이후 마산이 술과 간장을 만드는 양조산업의 출발지가 되었고, 1906년 이후에는 군산이 대거 이주한 일본인들에 의해 양조산업의 거점이 되었다. 인천도 곧 양조산업에 뛰어들게 된다. 한강 하류가 미곡 집산지가 되고 그에 따라 정미업이 발달하여 술의 재료가 되는 양질의 미곡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인천의 양조업이 발전하였다. 1920년대 초반 인천에는 한국인 소유의 양조장 14개, 일본인 소유 7개 등 21개의 양조장이 있을 정도였다.

민운기씨가 삶의 미술, 아니 삶 자체를 실현하는 대안공간인 스페이스빔이 있는 자리가 바로 옛 인천양조주식회사 자리다.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서 영화초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은색 깡통 로봇이 사색에 잠긴 듯 서 있는 건물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이 70여년 역사의 인천양조장 건물, 곧 지금의 스페이스빔이다.

민운기씨는 1995년 4월부터 인천의 작가들과 함께 ‘지역미술연구모임’을 만들어 거대해져 가는 글로벌 도시 안에서 점점 왜소해지기만 하는 작은 삶의 의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2002년 1월 구월동에 스페이스빔을 열었으며, 2007년 9월 배다리의 양조장 공장으로 활동공간을 옮겨 왔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민운기씨는 도시 안에서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고 서로가 존중하며 우애의 터전을 만들 수 있는가를 모색해 왔다. 배다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인천시의 과도한 도심 재개발을 막아내기도 했다.

스페이스빔의 내부 전경. | 정윤수 기자

스페이스빔의 내부 전경. | 정윤수 기자

관 주도의 일방적 행정 추진
지금, 민운기씨는 또 하나의 싸움을 치르고 있다. 인천 동구(구청장 이흥수)가 지난 16일 구청 상황실에서 ‘배다리역사문화관’을 건립하겠다며 자문위원회를 개최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인천 동구에 따르면 이 ‘배다리역사문화관’은 지상 2층, 건축연면적 660㎡ 규모로 1층에는 근대생활관과 인물관, 영상체험관을 시설하고, 2층에는 근대산업 관련 특별전시관을 조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이흥수 구청장은 지역 및 문화·예술분야의 전문가 10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는데, 이 위촉과정이나 명단, 나아가 역사문화관 건립과정 자체가 배다리 마을을 오랫동안 가꿔온 사람들과는 거의 무관하게 관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구는 지역 언론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문위원 명단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로 배타적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중이다.

스페이스빔의 내부 전경. | 정윤수 기자

스페이스빔의 내부 전경. | 정윤수 기자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이 장르로서의 예술세계에서 벗어나, 생활 속으로 속속 진입하는 중이다. 그곳에 소중한 삶이 있고 반드시 보호해야 할 기억이 있으며 이로써 냉혹한 도시 정글에서도 얼마든지 우애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 성과가 귀하게 열매를 맺고 있다. 이때, 어김없이 시가 등장하고 구청이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무리한 토건개발을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발주의에 맞서 소중한 작은 삶을 지켜온 주민과 예술가들의 열매를 자신들의 치적으로 사실상 가로챈다. 작은 삶을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배태한 지역의 장소를 지켜낸 사람들로부터 공간도 빼앗고 기억도 빼앗아서 ‘가짜 낭만화’된 전시물로 뒤바꿔서 자신들의 정치적·행정적 입지를 도모하려는 획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민운기씨는 늘 그랬듯이, 지금도 싸우고 있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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