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차량도 중국산 ‘비상’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서울시 전동차 200량 구매 입찰 중국업체 참여 검토로 가시화…

국내 업체ㆍ부품사들 “빗장 풀리면 큰 타격” 긴장

국내 철도차량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 철도 역사 1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산 철도차량이 국내 시장에 들어올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업체가 국내 시장을 잠식할 경우 400개에 달하는 부품업체가 도산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중국 철도 공습의 진원지는 서울시다.

서울시는 지하철 2호선에 투입할 전동차 200량을 새로 사들일 예정인데, 중국 업체들에도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 창원시에 있는 현대로템 철도차량 생산공장. 내년에 중국산 철도차량이 국내 시장에 들어올지 관심거리다. | 현대로템 제공

경남 창원시에 있는 현대로템 철도차량 생산공장. 내년에 중국산 철도차량이 국내 시장에 들어올지 관심거리다. | 현대로템 제공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11월 초 중국을 방문하면서 “어떤 경우라도 (국내 특정업체의 전동차) 독점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전동차 납품의 첫 번째 조건이 안전이고 가격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지자체들 경영개선 위해 저가 차량에 솔깃
박 시장의 언급 이후 서울시의 이번 전동차 구매 입찰에서 중국 업체를 참여시킬 것이라는 예상은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이럴 경우 가격경쟁력이 있는 중국 업체가 국내 업체를 제치고 입찰을 따내 국내 철도차량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정부가 철도차량 분야를 국제시장에 개방한 이후 지금까지 프랑스 알스톰, 독일 지멘스, 일본 히타치, 캐나다 봄바르디에 등 내로라하는 외국계 업체들이 국내에 진출했지만 중국 업체는 아직 국내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철도차량 업계는 몇 년 새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중 고속철도와 지하철로 전동차 수요가 많은 한국도 주요 진출 대상이다.

중국 정부는 2008년 이후 자국 철도 인프라 투자를 통한 경기부양책을 실시하면서 철도산업의 덩치를 급격히 키워나가고 있다. 중국의 국영 철도차량 제조사인 베이처(北車·CNR)와 난처(南車·CNR)는 생산규모 면에서 세계 1·2위를 달리고 있는 초대형 업체다. 이 두 개 기업의 연간 생산능력은 7만5000량으로 이 중 전동차 생산능력은 약 3700량에 이른다.

중국 업체의 기술력도 이미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세계 선진 업체들이 앞다퉈 중국 현지화 생산체계를 갖춘 덕분에 고속전철과 전동차 제작기술을 이미 확보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최근 두 기업의 합병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자국 업체 간 출혈경쟁을 차단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CNR와 CSR가 합병되면 자산은 각각 1500억 위안(약 27조원)으로 예상 총 매출액은 3000억 위안(약 54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해외시장을 파고들기 위해 세일즈 외교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9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중국 정부가 인도 고속철 건설사업에 향후 5년간 200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내 업계에서는 자국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쌓은 기술력과 국가지도자의 세일즈 외교, 가격경쟁력 등 삼박자를 갖추고 있는 중국 업체가 진출할 경우 국내시장을 크게 잠식해 나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내 관련 업계의 위기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배경이다.

국내에서는 현대로템이 프랑스·독일 등 다른 선진국들처럼 철도차량 생산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현대로템은 정부가 1999년 업체간 과열경쟁을 막기 위해 당시 대우중공업·현대정공업·한진중공업 등 철도차량 생산업체를 합치면서 출범한 회사다.

국내업체, 보호막 기대보다 경쟁력 키워야
국내에선 ‘골리앗’으로 군림하는 현대로템이지만 중국 업체가 진출하면 ‘다윗’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가장 중요한 가격경쟁력만 해도 현대로템은 중국 업체에 크게 뒤진다.
서울시가 이번에 입찰에 부치는 전동차의 1량당 예상 입찰가는 현대로템이 12억7000만원 선인 데 비해 중국 업체는 11억원 선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이번 입찰에서 전동차 200량을 구매할 계획이다. 중국 업체 차량이 낙찰받을 경우 서울시는 약 340억원의 예산을 절감하게 된다.

서울시가 중국 업체를 입찰에 참여시키려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중국 업체가 국내시장에 들어올 경우 관련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철도차량공업협회 관계자는 “중국 업체가 국내 철도차량 시장에 진출하면 400개 가까운 중소부품업체가 도산할 것”이라면서 “기존 지하철 시스템과의 호환문제 등 안전성과 관련된 검증도 제대로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의 이번 입찰에 중국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견해도 있다.

한국교통연구원 관계자는 “중국은 철도차량을 구매할 때 한국 기업의 참여를 허용한 적이 없다”면서 “중국 업체가 철도차량을 국내에 공급하게 되면 한국이 40여년간 쌓아온 지하철 운영시스템 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만일 중국 업체에 입찰을 허용할 경우 한·중 FTA 합의 내용과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근 체결된 한·중 FTA에서 전동차량은 쌀 등과 마찬가지로 초민감품목으로 분류돼 시장 개방을 하지 않도록 두 나라 정부가 합의했다.

업계 관계자는 “두 나라 정부가 전동차에 대해 시장 개방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이 분야에서 자국 시장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이라며 “서울시는 FTA에서 전동차가 제외된 이유를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중국 업체에 입찰을 허용할 경우 다른 지자체도 서울시 선례를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서울시가 가격경쟁력이 있는 중국 업체 전동차를 구입하게 되면 지하철을 운영하고 있는 부산·광주·대전·대구 등 다른 광역자치단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본다”면서 “서울시가 전동차 구매 예산을 한푼이라도 절감할 수 있는 방안과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 등 두 가지 문제를 놓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전동차 구매를 계기로 국내 업계도 중국 업체 진출에 대비해 가격경쟁력을 강화하는 등 발빠른 대응을 해야 한다는 충고도 나오고 있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서울메트로가 만성적자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싼 전동차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면서 “국내 생산업체와 부품업체들은 가격경쟁력 향상을 위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최병태 선임기자 cbtae@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