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문신이 떠오르는 ‘바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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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거리를 뒤덮을 기세로 세워지고 있는 저 거대한 표지석들, 우리 사회의 퇴행성에 전율을 느낀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씨가 맡는 현대 도시의 이미지 읽기는 여행 중 눈에 들어오는 강한 이미지를 채집하고 독해해서 도시와 문화, 일상, 삶의 단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전해드릴 것입니다.

자유로로 진입하는 장항IC 길목에 서 있는 ‘바르게 살자’

자유로로 진입하는 장항IC 길목에 서 있는 ‘바르게 살자’

그것은 관악산 입구에도 있고, 수락산 입구에도 있다. 저 남쪽 바다 서귀포 쇠소깍해변 소공원에도 있고, 북쪽의 고성군 송지호 철새관망타워 대로변에도 있다. 없는 곳이 없다. 산자수명하여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서 있고, 교통의 중심이라 차륜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길목마다 기립해 있다. 낙향처사의 안빈낙도가 기품 있게 펼쳐져 있다는 담양군 제월리의 그 유명한 면앙정 앞에도 있고, 산세 그윽하여 선풍이 드높다는 해남군 두륜산 입구에도 있으며, 콩밭 매는 아낙네가 고개 한 번 돌리면 볼 수 있는 청양군 칠갑산의 휴게소 꼭대기에도 있다. 도심은 말할 것도 없다. 서대문구 신촌로터리에도 있고, 종로구 종로타워 앞에도 있고, 부산역 지하철 10번 출구에도 있고, 부산진역 앞에도 있다.

저 경북 울릉군의 도동리·서면·북면마다 서 있고, 반대편 전남 신안군으로 넘어가서 도초도·자은도·신의도·임자도·안좌도에도 하나씩 기립하고 있으니 이러한 기호지세라면 장차 통일이 되어 개성 너머 평양이요, 금강산 너머 원산 지나 그 멀고먼 함경북도 산골마을 삼수 갑산까지 이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온 산하를 뒤덮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름 아닌, ‘바르게 살자’.

울릉·제주도까지… 전국 600개 넘어
인터넷 사진 전문 사이트 ‘레이소다’가 있다. 거기서 활동하는 사람 중에 아이디 ‘DLKN’을 쓰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직접 확인하여 지난 7월 25일자로 게시한 바에 따르면 이 ‘바르게 살자’ 조형물은 전국적으로 605개 정도 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 자유로로 나가는 길목 한복판에도 그것은 서 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그것을 본다. 시대착오적인 조형물이지만 사회의 퇴행현상이 뚜렷해질수록 그 조형물의 당대성에 전율을 느낀다.

‘바르게 살자’는 조형물은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가 세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할 지자체로부터 도로점용 허가를 얻어야 한다. 이 단체가 구청이나 읍·면·동보다는 훨씬 상급기관인 안전행정부의 협의기관인 데다가 회원들 대부분이 지역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관계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초 지자체는 점용 허가를 내준다. 물론 명분이 없지는 않다. 그 조형물이 ‘공공성’과 ‘계도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공공성과 계도성이란 무엇인가. 거리는 공유물이며 공공재다. 특정 기관이나 단체나 기업이나 개인에 앞세우는 이미지나 메시지가 압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아니다.

지난 7월 10일, 아마도 가장 최근에 세워진 조형물인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의 ‘바르게 살자’는 높이 2.4m, 가로 2.2m, 세로 68cm 크기다. 우람하고 장대하고 튼튼한, 묵시록적인 자연 재앙이 아니고서는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화강암이다. 전국 대부분의 조형물이 이런 규모다. 서기 3000년쯤에도 끄떡없을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문화유산이라도 될까. 하지만 지금은 공공재인 거리와 공원을 압도하는 위압적인 조형물이요, 그 형상 자체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돌덩어리다. 이런 것을 공공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공성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그것은 일시적으로 한 시대를 살게 된 사람들끼리 쟁론하고 토론하면서 형성해가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계도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발달한 현대 시민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계도하는가. 국가가? 지자체가? 특정 단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시 공간에 대해 주목할 만한 글을 써온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이미 수 년 전에 “경관을 망치는 흉물이며 시민을 계도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유치하고 시대착오적인 조형물”이라고 말했다. 흡사 ‘차카게 살자’라고 새긴 조폭의 문신 같다.

설악산 일대의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속초시 영랑호의 ‘바르게 살자’

설악산 일대의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속초시 영랑호의 ‘바르게 살자’

소시민들 위압하는 시대착오적 조형물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 삶의 불안한 이면을 파헤쳐온 소설가 천운영의 단편 중에 ‘입김’이 있다. 소설에는 한 사내가 나온다. 성실하게 살았다. 그 조형물이 지시한 것처럼 바르게 살았다. 별명이 ‘바른생활맨’이라나. 그러나 세상은 바르게 사는 사람을 짓눌러버린다. 세상의 모든 허위의 약속어음을 믿었다가 인생 전체를 부도 맞은 이 사내는 낫을 들고 문제의 조형물을 깨부수려고 한다. 그게 될 일인가? 세상은 만만치 않고, 더욱이 그런 걸 세운 사람들이 건재하는 세상에서 낫 하나로 어떻게 해볼 수는 없다. 그리하여 파국으로 몰려간다. 소설의 한 대목을 보자.

“근데 거기다 왜 그런 걸 세워놨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위압적으로 세워놓지 않아도, 바르게 살고 있잖아요. 하긴 바르게 살아봤자, 손해보는 세상인데, 손해보고 살자, 뭐 이런 뜻일까요?”(천운영, ‘입깁’에서)

이를테면 이런 뉴스 말이다. 지난 2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48부(재판장 여미숙)는 자신을 머슴처럼 부리는 상관의 횡포에 못견뎌 군복무 중 목숨을 끊은 이아무개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7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001년 입대한 이씨는 부대 참모장의 운전병으로 배치됐는데 이 참모장은 일과 외 시간에도 운전을 시키고 관사 청소, 빨래, 애견 돌보기, 잔심부름 등을 시켰다. 결국 운전병은 자살했다. 문제는 헌병대의 수사다. 헌병대는 “인터넷 게임을 하다 게임 아이템을 훔쳤고 이 때문에 처벌받을까 우려해 자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대원과 지인들의 진술이 모두 조작된 수사였다.

이런 판국에 산하 도처에 ‘바르게 살자’는 표지석은 1000개를 목표로 착착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이성과 감각의 시계는 자연의 흐름마저 거슬러 20세기 중엽으로 거꾸로 돈다. 21세기 중엽을 살아가야 할 어린 학생들이 20세기 중엽의 군사훈련의 잔재에 휩쓸려 제 꿈의 한 자락도 만져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갔다.

무엇이 문제인가? 누군가는 안전시설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 점, 중요하다. 그러나 안전시설만 있으면 20세기 중엽의 군사 집체교육 같은 것을 열대여섯 살 아이들에게 시켜도 좋은가? 사고가 난 충남 태안군 안면도 일대에도 ‘바르게 살자’는 조형물이 네 군데나 기립해 있다. 우리는 아직 근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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