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2 올해의 판결

디딤돌 판결 - 강제 징용 피해자 구제받을 길 열어준 대법원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우리 사회 정의·인권 확인시켜줬다”

“선고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지. 암… 만세를 불렀지. 아직 완전히 끝은 안 났지만 그래도 요즘은 즐거워.”

신천수씨(87)의 목소리는 힘에 부친 듯 여러 번 끊겼다가 다시 느릿느릿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한국 역사의 질곡을 거친 고된 삶에 신일본제철과의 긴 소송은 피로를 더해줬다. 그리고 15년의 소송 끝에 그는 대법원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에 대해 일본 기업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한·일 양국을 거쳐 15년 만에 처음으로 쥔 승소 판결이었다.

올해 최고의 판결로 선정된 일제강제징용자 손해배상 책임 인정 당사자인 신천수 할아버지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올해 최고의 판결로 선정된 일제강제징용자 손해배상 책임 인정 당사자인 신천수 할아버지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그는 1926년 전남의 농촌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살이었던 1943년 가을 평양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갔다. 친구는 함께 일본제철소에 가자고 했다. “기술을 배워가지고 한국에 나오면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겠냐. 돈도 많이 벌 거야”. 두 소년은 그 길로 일본행 배편에 올랐다.

그들을 실은 배는 본토에 이르기 전 작은 섬에 닻을 내리고 징용자들의 몸을 소독했다. 이후 오사카의 일본제철소에 도착했다. 신씨는 용광로 바로 옆에서 쉬지 않고 석탄을 퍼넣거나 화로의 석탄 찌꺼기를 제거했다. 별다른 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한 달에 2~3엔을 뺀 나머지 월급은 구경도 못했다. 기숙사 사감은 “돈 주면 갖고 도망갈까봐 안 된다. 집에 갈 때 줄 테니 염려 말아라”고 했다.

경찰은 수시로 들러 감시했다. 한국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는 검열돼 “잘 지낸다”는 말밖에 쓰지 못했다. 도시락과 잠자리는 형편없었다. 한 번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월급이 아닌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몸져 누워서 한 일주일 직장에 못 나갔지. 엉덩이를 되게 맞았어. ‘무엇이 아쉬워서 도망가냐. 단박에 다 붙들리니까 절대 생각을 말아라’ 이랬지.”

1945년 3월 미국의 공격으로 오사카 제철소가 파괴됐다. 그는 함경북도 청진에 건설 중인 제철소로 옮겨졌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일본 군인이 와 “소련군이 상륙했다. 모두 도망가라”고 외쳤다. 8·15 해방이었다. 함경북도 길주 첩첩산중으로 도망친 신씨는 귀국하려는 일본인들로 가득찬 기차에 겨우 올랐다. 이번에도 그의 자리는 뜨거운 기차 화통 옆이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떨어지는 불똥에 머리카락을 다 태우고 화상을 입은 채 서울에 도착했다. “곧장 남대문에 있는 제철소 서울사무소에 갔어. 근데 다들 도망가고 아무도 없잖아. ‘돈 내놔 이놈들아’ 하려고 갔더니만 없어, 아이고 허탕쳤구나 했지.”

1997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시민, 법률가들의 도움으로 밀린 월급을 달라는 소송을 시작했다. “기각, 기각, 기각”. 기각의 행렬이었다. 한국 법원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 1·2심에서 내리 졌다. 별 다른 기대 없이 기다리던 지난 5월 24일 대법원에서 뜻밖의 낭보가 전해졌다.

15년 기각의 행렬에 뜻밖의 낭보
“(원고 패소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낸다.”

이날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신씨를 포함해 4명의 강제징용자가 신일철을 상대로 낸 소송을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미쓰비시 강제징용자들이 낸 같은 취지의 소송도 역시 파기됐다. 대법원은 그동안 이어진 한·일 양국의 패소 논리를 모두 깼다.

“(원고 청구를 기각한)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충돌해 이를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판결을 승인해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 한국 법원 원심 판결은 일본 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 외국 판결 승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

대법원은 일본 판결 중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일본인으로, 한반도를 일본 영토로 본 부분을 문제삼았다. 이 판결이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1965년 맺어진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 범위도 제한적으로 해석해, 이 협정에 따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고 봤다. 강제징용 당시 일본제철과 현재 신일본제철의 동일성도 일본법이 아닌 국내법을 기준으로 인정해 “같은 법인이므로 원고들의 손해배상 청구권 행사는 정당하다”고 했다.

선정위원단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서 피해 구제 받을 수 있는 길을 연 이 판결을 올해 ‘최고의 판결’로 뽑았다. 과거사 청산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에 중요한 법적인 논리를 마련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선정위원단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거의 50년이 되어 가는 시점이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지배 문제가 남아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협정을 개정하거나 아예 폐기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판결”이라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신천수 할아버지에게 일본의 지인들이 써준 격려 액자. | 김정근 기자

신천수 할아버지에게 일본의 지인들이 써준 격려 액자. | 김정근 기자

최고의 판결과 함께 올해 우리 사회에 정의와 인권을 확인시킨 ‘디딤돌 판결’에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새로운 소통 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킨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두 건 포함됐다. 이미 온라인과 SNS가 주요한 소통문화로 자리잡았음에도 그동안 표현의 주제나 방식에 과도한 제한이 이뤄져왔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특히 헌법재판소의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위헌 결정은 올해 ‘최고의 판결’ 자리를 두고 끝까지 경합했다. 헌법재판소 전원합의부는 지난 8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44조의 5에 대해 재판관 8명 만장일치로 위헌을 선고했다. 인터넷 글을 쓰거나 읽으려면 본인 확인을 받도록 규정한 이 조항이 익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재판소는 결정문에서 “익명이나 가명으로 이뤄지는 표현은 명시적·묵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출해 국가권력이나 사회 다수의견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 확장시킨 헌재 결정 두 건 포함
헌재는 지난해 12월에도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와 선거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정을 내놓았다.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구 공직선거법 93조 1항의 ‘기타 이와 유사한 것’이라는 문구를 ‘각종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정치적 의사표현과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바탕이 돼야 할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두껍게 보장한 결정이라는 데 선정위원단의 의견이 모아졌다.

노동분야에서도 두 건이 디딤돌 판결에 꼽혔다. 비정규직과 특수고용노동자 등 주변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판결들이다. “한국철도공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성과상여금 지급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부당하다”고 한 원심을 확정한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 판결은 2007년 비정규직 차별시정제도 시행 이래 차별시정 대상이 되는 행위의 범위를 넓힌 첫 대법원 판례라는 점에 의미를 둬 선정했다. 학습지 노동자를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라고 인정한 서울남부지법 형사7단독(남선미 판사) 판결과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성을 인정한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박태준 부장판사)의 판결은 하나로 묶어 디딤돌로 뽑았다.

법원의 판단으로 한·미 FTA 번역오류의 정오표도 공개되게 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이인형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외교통상부가 한·미 FTA 번역오류 정오표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지난 5월 외교통상부의 소 취하로 확정됐다. 재판부는 “협정문의 번역오류로 인한 개정내용이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공표되는 것은 한·미 FTA 협상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여론 형성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는 고도의 공익적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이는 극도로 정보가 제한되는 국제통상 분야에서도 국민의 알권리를 폭넓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됐다.

육아휴직 후 복직한 여성의 책상을 빼고 욕설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강제퇴직시킨 고용주에 대해 위자료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과 교도소 수용자들에 대한 서신검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도 올해 디딤돌에 이름을 올렸다.

미신고 집회에 대한 해산명령이 위법하다고 본 대법원 판결과 파룬궁 수련자를 난민으로 인정한 서울고법 판결도 함께 선정됐다.

[특집| 2012 올해의 판결]디딤돌 판결 - 강제 징용 피해자 구제받을 길 열어준 대법원

<유정인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jeongin@kyunghyang.com>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