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야구단보다 더 센 재일유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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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독교청년회와 첫 대결 105년 역사 선진화 전기 마련

춘분을 지나 청명으로 가는 길목에 봄빛이 화사하다. 하루가 다르게 봄꽃이 피어나는 가운데 2011년 프로야구가 개막하였다. 광주구장에서 열린 홈팀 기아와 원정팀 삼성의 2연전 경기에서는 시원한 만루홈런이 연일 쏟아져나와 개막전의 열기를 북돋웠다. 금년 야구는 연초에 야구영화 글러브가 상영되어 야구에 휴먼 드라마의 감동을 심었던 터라 관람하는 재미가 색다를 것 같다.

YMCA 야구단이 1911년 일본 원정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맨 오른쪽 원안이 선교사 질레트. |경향신문

YMCA 야구단이 1911년 일본 원정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맨 오른쪽 원안이 선교사 질레트. |경향신문

한국 야구영화는 야구경기에 관한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배경으로 제작되는 경향이 있다. 2009년 제작된 <나는 갈매기>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지휘하는 롯데 자이언츠 팀에 관한 다큐 형식의 영화인데, 이 무렵은 한국 야구가 베이징 올림픽 우승, WBC 준우승 등의 쾌거를 이룩한 후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야구 붐이 일어나던 때였다. 1986년 제작된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시대를 풍미했던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각색한 영화다. 이때는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된 후 한국 사회에서 야구경기가 일반대중 속으로 급속히 침투해 들어가던 때였다. 80년대 이후 야구는 야구장에서뿐만 아니라 중계방송, 스포츠신문, 만화방, 전자오락실, PC게임 등등 곳곳에서 거의 날마다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선교사 질레트 YMCA 통해 야구 보급
2002년 제작된 은 현재의 야구에 관심을 쏟는 다른 야구영화와 달리 과거의 야구, 그것도 초창기의 한국 야구를 조명하는 조금 별난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이 일본 야구단과 대결해 최후에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국 야구선수들이 일본과 미국의 프로야구팀에 진출하면서 일본과 미국 야구가 한국 사회의 일반대중에게 친숙해져갔던 세계화 시대의 문화적 상상력으로 100년 전 한국 야구의 역사적 광경을 돌아본 것이다.

YMCA 야구단의 탄생은 전적으로 YMCA를 창립한 질레트의 개인적인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YMCA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렸는데, 질레트는 1903년 서울에서 이를 창립하고 총무가 되자 선교 전략의 일환으로 야구 보급을 계획하였고, 이듬해 미국에서 야구용품을 들여와 자기가 인도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야구를 가르쳤다. 한국 야구의 시작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는 1906년 훈련원 광장에서 진행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과 독일어 전문 외국어학교인 덕어학교 야구단의 시합이었다. 논자에 따라서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과 관립한성고등학교 야구단의 시합을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로 보기도 한다. 황성 팀과 한성 팀의 야구경기는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 차례씩 있었는데, 미국 선교사의 지도를 받는 황성 팀이 일본인 체조과 교사에게 지도를 받는 한성 팀과 겨루어 처음에 패했다가 나중에 설욕했다는 것이다.

김혜수, 송강호가 출연했던 영화 <YMCA 야구단> (감독 김현석). |경향신문

김혜수, 송강호가 출연했던 영화 (감독 김현석). |경향신문

초창기 야구 환경은 대단히 열악했다. 전언에 의하면 당시 야구선수들은 유니폼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조선 복장에 조선 짚신을 신고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야구방망이 하나를 갖고 선수들이 교대로 사용하였으며, 내야는 미트로, 외야는 맨손으로 했다고 한다. 심지어 누상에 주자가 없을 경우 투수가 투구를 하는데 포수가 아프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패스시켜 백네트로 보내버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훈련원 광장이 본격적인 야구장으로서 기능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곳은 각종 운동회가 펼쳐지는 너른 공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재일 한국유학생이 여름방학을 맞이해 야구단을 조직해 국내 야구단과 경기를 치른 것은 한국 야구 수준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재일 한국유학생 야구단은 국내 학생의 체육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당시 재일 한국유학생 단체였던 대한흥학회의 운동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직한 팀이었다. 재일 유학생은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일본 학생 및 중국 학생과 야구시합을 해서 이미 명성을 얻은 바 있었다. 이 해 여름, 운동부는 야구 팀과 테니스 팀을 조직하고 지휘관 윤익현을 국내에 파견해 서울, 평양, 안악, 철산 등의 체육단체에 이를 알려 경기를 주선하게 하였다.

선진 서양문물 수용 상징 역사적 사건
재일 한국유학생 야구단이 서울에서 야구경기를 치른 것은 7월 23일이었다. 상대는 국내 최고의 야구팀 황성기독교청년회, 그 중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역시 훈련원 공터에서 모인 양팀은 오후 4시에 경기를 시작했다. 경기에 앞서 기호흥학회에서 오찬을 제공했고,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사회 신사 및 학생, 본국 부인과 서양 부인이 도합 약 500~600명이나 운집하였다. 유학생 팀은 야구 유니폼과 스파이크가 부착된 야구화를 착용해 겉모습에서부터 깊은 인상을 주었고, 경기 내용에 있어서도 19점 대 9점의 현격한 격차로 선교사 팀을 제압하였다.

승부가 나자 유학생 팀은 스스로 만든 야구 운동가를 제창하였다. ‘소년 남자’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총 5절의 가사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무쇠 골격될 근육 소년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1절) ‘만인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절세 영웅대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후렴) 5절의 운동가를 모두 부른 유학생 팀은 만세를 삼창한 뒤 저녁때가 되어 돌아갔다.

재일 한국유학생 야구단과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의 야구경기는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단순한 야구경기가 아니었다. 황성신문에서 감격해했던 것처럼 그것은 찬란한 문명의 수입을 상징하는 큰 행사였다. 당시 유학생들이 국내에 돌아와 단지 야구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강습소를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해서 유학 가서 배운 것을 보급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서양 학계의 체조법을 모방해서 국내 체육의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울은 물론 황해도·평안도 등지에서 열린 야구경기는 이러한 모든 것과 결합하여 연쇄적으로 일어난 유학생들의 여름방학 활동이었다.

근대문명의 지향과 교육구국의 열정으로 가득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야구는 각 학교에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유학생 팀과 선교사 팀의 역사적인 야구경기가 펼쳐친 이듬해에 비록 한국은 일본에 병합당하고 말았지만 야구는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은 전설적인 무적 팀이 되어 국내 야구를 평정하고 급기야 일본에 건너가 원정 경기를 감행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전설의 주인공 YMCA는 한국 초창기 야구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받아야 하겠지만 YMCA의 성장, 그리고 YMCA가 상대한 서울과 황해도·평안도 야구단의 성장을 견인한 것은 유학생 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909년 그해 여름을 배경으로 재일 한국유학생 야구단을 주인공으로 삼아 야구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어떨까?

노관범<가톨릭대 교수> jagang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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